2011년 3월 26일 토요일

무림드래곤3

데르나 공작가
  대도시 아르한.
  아르한 도시의 입구 성문에 두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귀공자 티가 나는 백금발색에 어깨까지 기른 좀 부스스하지만 그래도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십대 후반의 소년. 그리고 옆에 있는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배고파~.”
  키라이스트가 에이라나 옆에서 칭얼거렸다.
  “시끄러워.”
  “흑... 너무해... 아침에 점심까지 굶기는 게 어디 있어?”
  그런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너희 집 가서 실컷 먹어라.”
  “쳇...”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키라이스트가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런 말을 싹 무시한 에이라나는 하품을 하며 성문을 지날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제제하지 않았다.
  비상시도 아니고 아직 키라이스트가 갔던 별장이 습격당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기에 조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문을 지나고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에이라나와 키라이스트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하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외모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외모였으니.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두 사람은 데르나 공작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저택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
  그런 그들이 저 멀리서 공작가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티스가 같이 공작가의 저택을 지키는 토먼에게 말했다.
  “이보게 토먼, 저기 어떤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지 않은가?”
  티스의 말에 토먼이 정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누구지?”
  그렇게 두 병사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정문 앞에 도착했다.
  “헉! 도, 도련님!”
  티스가 백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키라이스트를 보고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경악하며 말하자 토먼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저, 정말인가?”
  토먼도 키라이스트를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라이스트인 것을 확인하자 다급하게 말했다.
  “별장에 가셨던 도련님이 어떻게... 어, 어쨌든 얼른 경비대장님께 알레고 옴세.”
  그렇게 토먼이 허둥지둥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키라이스트가 정문에 도착해서 생긋 웃으며 티스에게 말했다.
  “수고하시는군요.”
  그 말에 티스가 당황하며 말했다.
  “도, 도련님... 일주일쯤 후에 도착하실 줄 알았는데... 그리고 같이 가셨던 다른 분들은...”
  티스의 말에 키라이스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러고는 힘겹게 말했다.
  “그건... 일당 아버지부터 만나 봬야겠군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정문이 열리며 한 기사가 다급하게 튀어나왔다.
  “키라이스트님!”
  우연히 정문을 지나가다가 토먼에게 말을 듣고 다급하게 나온 것이다. 그 기사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알론 경.”
  그 기사를 아는 듯 키라이스트가 반갑게 말하자 알론이라 불린 기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시고 혼자서...”
  그러다가 문득 키라이스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은발에 은안의 소녀를 발견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에이라나의 미모에 멍해진 것이다. 티스도 에이라나를 발견했는지 멍해졌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빨리 들어가지?”
  에이라나가 키라이스트를 보며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알론에게 말했다.
  “알론 경, 설명하긴 복잡하구요. 일단 아버지부터 만나 봬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제가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입니다.”
  키라이스트의 말에 알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공작님부터 만나 뵙지요. 이 분은...”
  “같이 만날게요. 괜찮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알론이었다.
  공작을 만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키라이스트가 아무 일행도 없이 더 빨리 공작가로 돌아왔다고 하자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소란스러워져 데르나 공작을 빨리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데르나 공작도 갑작스럽게 키라이스트가 돌아오자 당장 데려오라고 했다.
  안 만나려 해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소란스러워진 것은 키라이스트와 같이 온 아름다운 여인 때문이었다.
  은발에 은안을 가진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은 ‘키라이스트와 결혼하지 않을까?’라는 이상한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데르나 공작의 집무실로 키라이스트와 에이라나가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저...”
  공작가의 집무실을 지키는 기사가 에이라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 기사의 부름에 에이라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가 에이라나의 허리에 있는 은아와 흑아를 보며 말했다.
  “검은 주고 가셔야 합니다.”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검은 왜?”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는데... 외부인이 검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럼... 그 말은 내가 네 아버지를 암살이라도 한다는 이야기야?”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아무튼! 규칙이야.”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쳇! 깐깐하기는...”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가 흑아와 은아를 기사에게 넘겼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죽고 싶지 않으면 검 뽑지 마. 그 녀석들 남들이 자신들을 뽑는 걸 극히 싫어하거든?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뽑으면 죽어.”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키라이스트.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누나, 웬 헛소리를 해?”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난 헛소리한 적 없어.”
  에이라나와 키라이스트가 집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에이라나가 한 말에 멍해지는 키라이스트와 기사였다.
  “훗! 난 검 따위 없어도 사람 하나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데...”
  어쩜 저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많이 삐뚤어진(?) 에이라나였다.
  아르카아 디온 데르나.
  현 데르나 공작가의 공작이었다.
  아르카아 공작은 자신의 하나뿐인 자식이자 다음 대 후계자인 키라이스트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이 왔다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여자에 별로 관심이 없던 아들이 여자에 관심이라도 생긴 것일까?
  막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말했다.
  “들어와라.”
  그러자 문이 열리며 자신의 아들인 키라이스트와 자신의 아들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아르카아 공작은 아름다운 에이라나를 보고 감탄했다.
  그런 아르카아 공작을 보며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보며 아르카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왜 벌써 온 것이냐? 그리고 혼자 있다니?”
  아르카아 공작의 물음에 숨을 크게 들여 마신 키라이스트는 다시 한 번 내쉬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버지... 그게, 사실은...”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물론 에이라나를 만나기 전에 잠시 멈췄지만 그 잠시 동안 공작은 분노를 표출하기 충분했다.
  “이 자식들! 감히 누구의 아들을...”
  뿌득!
  자신의 아들이 죽을 뻔했으니 크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뿌드득 갈던 공작이 물었다.
  “그래,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그런 공작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여기 에이라나 누나를 만나서요. 밤의 암살 위협에서도 여러 번 구해주었구요.”
  그 말에 공작이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검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고운 손과 가는 팔을 가진 여자가 어떻게 검을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기에 감사의 예를 표했다.
  “감사하오. 이름이 에이라나라 했소?”
  그러자 에이라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에이라나라고 합니다.”
  그렇게 에이라나는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카아 공작을 보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친절한 편이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에이라나의 말에 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는 동생의 아버지 되시니 말하겠습니다. 힘만이 검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부드러움도 있어야 더욱 완벽한 검술이 됩니다. 지금 당신이 그 경지에서 헤매고 있는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의 검에 부드러움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에이라나의 눈에는 보였다.
  지금 눈앞의 키라이스트의 아버지라는 공작이란 사람의 경지가.
  소드마스터 중급.
  아직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가 소드마스터 상급의 문턱에서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라나의 눈에는 모든 게 한눈에 보였다.
  물론 저 경지에 있으면서 검술이 너무 한쪽에만 치우쳤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에이라나가 보기에는 공작은 힘을 중시하는 타입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부드러움도 보이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려면 힘과 부드러움이 반반이 되어야 했다.
  에이라나의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뜬 아르카아 공작이 물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헤매는 것인지가 보인단 말인가?”
  그러자 에이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네. 강자와의 대결 한 번이면 당신은 소드마스터 상급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에이라나의 말에 공작은 멍해졌고 키라이스트는 경악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에이라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신은 끼어들 수 없는 세계.
  지금 이 두 사람의 대화였다.
  소드마스터 상급이라니.
  그렇게 잠시 침묵하던 공작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강자는 누구를 말하는 건가? 이 영지에는 나보다 강한 자는 없네. 혹 자네를 말하는 건가?”
  그 말에 에이라나가 생긋 웃었다.
  “제가 어떻게 공작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전 그저 여행자일 뿐이자 키라이스트의 아는 누나일 뿐입니다.”
  그 말에 잠시 빤히 에이라나를 쳐다보던 공작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크큭... 크크크... 푸하하하하하!”
  갑작스러운 공작의 웃음에 키라이스트는 당황했지만, 에이라나도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우리 집에 머물고 싶을 만큼 머물게. 귀빈 대접을 해줘야지. 정말 내 딸로 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구먼.”
  공작이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었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에이라나가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대화 속에서 키라이스트는 당혹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자신이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키라이스트는 그저 멍하니 있다가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키라이스트는 궁금증을 느끼며 에이라나에게 물었다.
  “누나, 아버지가 소드마스터 상급이 되신다고?”
  그 말에 에이라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응, 그래도 얼마 후면 오를 것 같았는데, 답답해서 직설적으로 말해줬지.”
  마교에서는 상대를 도와주자고 생각하면 그냥 속 시원하게 도와주는 편이다. 정파처럼 실없이 비비 꼬며 도와주는 것을 답답해하며 짜증을 내는 마교인들이었다.
  도와줄 거면 제대로 도와줄 것이지, 개뿔도 없는 것들이 비비꼬며 쓸데없이 사람 속만 썩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에이라나도 그런 것이 남아있어 헤매고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냥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 해도 딱히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키라이스트와 에이라나는 아까 에이라나의 검을 가져갔던 기사를 찾았다. 그 기사는 검 두 자루를 쥔 채로 에이라나와 키라이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는 흑아와 은아를 넘기며 말했다.
  “여기.”
  그렇게 에이라나는 흑아와 은아를 손에 쥐었다.
  우웅! 우웅! 우웅!
  그러자 다시 주인을 만난 것이 기쁜 듯 우웅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하는 두 검이었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키라이스트와 기사.
  -주인~ 저런 허접한 검사에게 나를 넘기다니.
  -살펴본 바로는 참 허접한 놈이었다.
  동시에 에이라나의 머리로 울리는 은아와 흑아의 목소리.
  그런 두 검의 목소리에 에이라나가 속으로 말했다.
  ‘시끄러워!’
  그렇게 속으로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키라이스트가 물었다.
  “뭐야? 그 검들? 보통 검들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키라이스트의 물음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말했잖아? 멋모르고 뽑으면 죽는다고.”
  그 말에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짓는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한 마디 덧붙였다.
  “자세한 건 뭐, 나중에 말해줄게.”
  방금 전 에이라나의 검이 보인 반응은 분명 에고소드에서나 볼 수 있는 반응이었다.
  여전히 멍한 표정의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자~ 가자. 너희 집 안내나 해줘.”
  멍한 키라이스트의 등을 툭 쳐주는 에이라나.
  그제야 키라이스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따라와.”
  그렇게 키라이스트가 에이라나를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에이라나가 키라이스트의 안내를 받으며 마지막으로 정원을 안내받으려고 할 때였다.
  “상당히 호화스럽네?”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당연하지. 우리 가문이 제국 삼대 공작가 중 하나라고.”
  그 말에 피식 웃는 에이라나.
  둘이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앉자 시녀가 다가와 차와 쿠키를 내주고 갔다. 쿠키와 차를 먹으며 정원을 둘러보고 있을 때 키라이스트가 에이라나에게 물었다.
  “누나, 누나의 검술 실력은 어느 정도야?”
  “응?”
  갑작스러운 키라이스트의 질문에 에이라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아버지에게 다음 경지에 오르는 힌트를 줄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실력자란 뜻이잖아? 그럼 누나는 적어도 소드마스터 상급은 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
  키라이스트가 뒷말을 삼켰다.
  사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겨우 24세의 나이에 소드마스터 상급의 실력이라니.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눈앞에 보인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이 중원과 많이 달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공 심법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원 무림보다는 자연의 마나의 농도가 진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에이라나가 이곳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하유현이라는 존재가 아닌 에이라나라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중원 무림에 있을 적에 느끼던 마나의 농도를 잊어버린 에이라나였다. 그래서 중원과 리샨 대륙이 똑같은 기의 농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학은 끝이 없는 거야, 그리고 경지가 더 높다고 해서 더 모르라는 법도 없고.”
  “무학?”
  생소한 단어에 키라이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음, 그냥 검학이라고 생각해. 검의 학문.”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에이~ 뭐야, 그게.”
  그런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네가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한 예 하나를 가르쳐주지. ‘베고 싶은 것만 베어라,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베는 검은 진정한 검이라 할 수 없다.’ 알겠어?”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게.”
  그 말에 에이라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스릉~
  “허억!”
  에이라나가 은아를 뽑았다. 섬뜩한 냉기와 예기에 헛바람을 들이키는 키라이스트.
  그런 키라이스트를 무시하고 에이라나가 은아의 날에 자신의 손바닥을 댄 다음 그대로 그어버렸다.
  그것을 보고 기겁하는 키라이스트.
  “누나!”
  하지만 끝까지 강하게 그었는데, 에이라나의 손바닥에는 그저 빨간 선 하나만 생겼을 뿐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키라이스트가 물었다.
  “손 괜찮아?”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자, 베이지 않았지?”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키라이스트.
  “어떻게...”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심검의 모리 중 하나지, 아까 내가 말한 말과 관련이 있어. 검에 마음을 담으면 자신이 베고 싶은 것만 벨 수 있지.”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았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가검 아냐?”
  휙!
  갑자기 에이라나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발검을 했다.
  잠시 후,
  우당탕! 챙그랑!
  테이블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자... 가검이 아닌지 맞는지 몸으로 확인해볼래?”
  그리고 생긋 웃는 에이라나.
  하지만 키라이스트는 그 웃음이 섬뜩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하하... 내가 헛소리를 해서...”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왜? 가검이라며?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해줄게.”
  “허억~ 누나, 장난이라도 그런 말은...”
  “나 장난 아닌데?”
  히죽!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아아아악! 살려줘!”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키라이스트.
  “후후후... 내가 가볍게 손봐주지.”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검을 검집에 넣은 다음 키라이스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흐아~.”
  키라이스트가 에이라나에게서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흐아~ 누나가 정말 날 베는 일은 없겠지만, 최소한 날 팰지도 몰라.”
  에이라나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렇게 도망친 키라이스트가 도착한 곳은 저택의 뒤뜰이었다.
  자신이 어릴 때 많이 뛰어 놀았던 곳이었다. 오랜만에 와보는 뒤뜰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감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퍼억!
  “커억!”
  갑자기 뒤통수에서 엄청난 충격이 전해지면서 고통이 퍼져나갔다. 그 고통을 느끼며 키라이스트가 뒤통수를 부여잡고 끙끙댔다.
  “내 말이 거짓말 같이 들리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키라이스트.
  키라이스트는 뒤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누나.”
  “왜?”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알지?”
  “그래서?”
  키라이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후후후... 키라이스트, 난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을 줄 몰랐다. 그래서 생각했지, 어떻게 하면 네가 믿을지.”
  “하하하... 난 누나 말을 믿어.”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난 네가 안 믿는 것 같아.”
  에이라나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은 어리석은(?) 동생에게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기로 맘먹었다.
  에이라나가 말했다.
  “너희 집 연무장 있지?”
  “그, 그건 왜?”
  키라이스트는 불길함을 느끼며 말했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응? 나랑 대련하자고.”
  “오~ 신이시여!”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는 장난삼아 그녀의 말에 토를 단 것을 전적으로 후회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키라이스트였다.
  에이라나의 말을 뻥으로 치부한 것이 너무도 후회되는 키라이스트였다.
  * * *
  “누나... 다시 생각하는 게 어때? 내가 누나 상대가 될 리가 없잖아? 응?”
  “싫어. 넌 나랑 한판 붙는 거다.”
  그 말에 울상을 짓는 키라이스트.
  자신이 에이라나와 싸우면 맞기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봐온 에이라나의 신위를 보자면 그 자체가 무시무시했다.
  울상을 짓는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에이~ 설마 내가 널 죽이기야 하겠냐? 너무 걱정 마. 적당히 할게.”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속으로 절규하는 키라이스트.
  덥석!
  하지만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키라이스트의 뒷덜미를 잡았다.
  움찔하며 놀란 키라이스트는 어색한 표정으로 에이라나를 올려보았다. 에이라나는 생긋 웃고 있었다.
  “가자.”
  “으...응.”
  질질질!
  키라이스트의 대답을 듣고 에이라나가 키라이스트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갔다.
  ‘오~ 폴루스토이아 님.’
  폴루스토이아는 평화의 신이었다.
  에이라나가 키라이스트를 끌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합성이 터지는 곳을 찾아 씨익 웃었다.
  그곳이 분명 연무장일 것이다.
  “누나... 땀 냄새 나는 연무장보다는... 그냥 우리 산책하자. 연무장이 어딘지도 모르잖아?”
  키라이스트는 아직도 에이라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설득에 매달렸다. 하지만 ‘한 번 선택한 일은 다시는 번복하지 않는다!’ 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에이라나는 그런 키라이스트의 말을 무시했다.
  질질질!
  ‘헉! 어떻게 연무장이 있는 곳을!’
  에이라나가 향한 곳은 데르나 공작가의 저택에 있는 여덟 개의 연무장이 있는 곳 중 가장 크고 좋은 가장 정예 기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크억~ 개망신 당하겠다.’
  아무리 에이라나의 실력을 인정한다고 하나 여자에게 진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키라이스트는 개망신 당할 것이란 생각에 울상이던 얼굴이 더더욱 울상이 되었다.
  “응? 키라이스트 님 아니신가?”
  “도련님이 맞으신데.”
  “그런데 도련님을 끌고 오는 여자는 누구지?”
  “도련님이랑 같이 왔다던 그 여자 아니야?”
  한참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던 데르나 기사단.
  기사단의 기사들은 저 멀리서 공작가의 후계자인 키라이스트와 한 여인이 같이 연무장 쪽으로 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키라이스트가 뒷덜미를 잡힌 채 에이라나에게 끌려오자 더더욱 의아했다.
  키라이스트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검사였다.
  그래도 검기, 즉 오러를 조금 다룰 줄 아는 검사로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실력자라는 얘기다.
  그런 그가 한 여인에게 이끌려오는 것은 그들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인은 두 자루의 검도 차고 있었다.
  “누나~ 다시 한 번 생각을!”
  “시끄러워! 넌 나랑 한판 붙는 거다.”
  “으악~ 제발!”
  기사들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저 소리로 봐서 둘이 한판 붙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연무장에 도착하자 기사들이 말했다.
  “도련님, 여기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데르나 공작가의 기사단장인 아르카 자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르카 자작은 데르나 공작과 같은 소드마스터 중급의 검사였다.
  그런 아르카 자작을 보며 눈을 잠시 빛내던 에이라나가 말했다.
  “키라이스트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요. 버릇 좀 고쳐주게요. 연무장 좀 빌릴게요.”
  “내가 언제 누나를 무시했어?”
  “어허~ 나의 깨달음 중 하나를 거짓으로 매도한 건 나를 무시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그럼 누나는 칼로 손바닥을 그었는데 베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가검이라고 생각하지 진검이라고 생각하겠어?”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닥치고 올라가!”
  철푸덕!
  “으악~ 커억~.”
  키라이스트는 에이라나가 자신을 던지자 비명을 지르다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아픔에 고통을 호소했다.
  에이라나의 양손에는 언제 들었는지 연무장 구석에 있는 목검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에이라나는 은아와 흑아를 연무장 바닥에 놔두고 말했다.
  “내가 너에게 검이 어떤 건지 톡톡히 보여주지.”
  휙!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키라이스트에게 목검을 던졌다.
  “으엇.”
  그 목검을 받아든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안 가르쳐 줘도 되는데...”
  에이라나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안 믿으면 믿게 만든다. 바로 천마교의 신조 중 하나다. 네가 안 믿으니 믿게 만들어 주지.”
  “이제 믿는다니깐.”
  하지만 에이라나는 그런 키라이스트의 말을 딱 잘라 무시했다.
  어느새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각자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눈을 빛내며 두 사람에게 집중했다.
  오늘 혼자서 저택으로 돌아온 키라이스트.
  그런 키라이스트와 함께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같이 왔다고 했다. 아직 왜 왔는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에이라나의 실력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자신들의 소주군인 키라이스트와 대련하려고 한다. 궁금증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에이라나가 생긋 웃었다.
  저벅!저벅!저벅!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키라이스트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었다. 적을 상대로 저렇게 느긋하게 걸어가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키라이스트는 절대 어이없어만 할 수가 없었다.
  키라이스트는 잘 알고 있었다.
  저렇게 느릿하게 걷는 것 같아도 검을 휘두르면 언젠가 등 뒤에서 에이라나가 나타나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며칠 동안 죽어간 적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에잇!”
  키라이스트가 그냥 두 눈 딱 감고 검을 휘둘렀다.
  딱!
  그런 키라이스트의 검을 에이라나는 그저 가볍게 막아버렸다.
  “헉!”
  키라이스트는 느껴지는 압박감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무슨 여자의 힘이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자신은 두 손으로 힘껏 휘두른 검이다. 그런데 에이라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것도 한 손으로 가볍게 막아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이런 가는 팔에서 이런 힘이...”
  키라이스트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때? 재미있지? 검을 떼려고 해도 안 떨어지고?”
  “헉!”
  에이라나의 말대로 검이 쇠붙이가 자석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당황하는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착검의 묘리지.”
  검이 그대로 붙는 것을 착검이라고 한다. 이런 착검에 대항하려면 마나를 불어 넣거나 아니면 자신도 착검의 묘리로 대응해야 했다. 아니면 상대방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거나.
  그래야 착검을 뗄 수 있었다.
  하지만 키라이스트가 어떻게 하기에는 에이라나라는 존재는 너무도 강했다.
  키라이스트가 그 상태로 한참을 낑낑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기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어하는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도 슬쩍 힘을 빼주고 착검도 풀었다.
  딱!
  에이라나가 키라이스트를 밀었다.
  그러자 크게 휘청거린 키라이스트. 그는 자세를 잡고 에이라나를 주시했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했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빤히 바라보던 에이라나가 말했다.
  “내가 아까 심검이라고, 마음의 검을 말한 적 있지?”
  “...?”
  에이라나의 갑작스러운 말에 키라이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입을 열었다.
  “자신의 마음대로 검에 예기를 없애서 아주 날카로운 보검도 날을 죽일 수 있다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키라이스트를 확인하고 에이라나가 말을 이었다.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뭉뚝한 검에 예기를 입힐 수도 있어. 웬만한 보검보다 더한 예기를.”
  그렇게 말하는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의 몸이 굳었다.
  그는 에이라나의 검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는 뜻은 에이라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검에 베이면 큰일 난다는 뜻이었다.
  그런 키라이스트와 달리 기사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 있어 지금 에이라나가 말하는 것은 헛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에이라나가 다시 키라이스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에이라나는 느릿느릿하게 거리를 벌리고 키라이스트의 목검의 정 중앙을 베었다.
  툭!
  그리고 잘려나가는 목검.
  그것을 경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키라이스트와 기사들.
  에이라나는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다시 목검을 느릿느릿 휘두르기 시작했다.
  꼭 엄청난 보검으로 무를 자르듯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목검.
  결국 검 손잡이만 남고 검은 모두 떨어졌다.
  기사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만들 수 있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에이라나는 멍한 표정의 키라이스트를 보며 말했다.
  “뭘 멍하니 서 있는 거냐?”
  퍽!
  “커억!”
  에이라나는 멍하니 서 있는 키라이스트의 뒤통수를 목검으로 가격했다.
  털썩!
  그리고 바로 기절하는 키라이스트였다.
  “헉!”
  “도련님!”
  그것을 보고 다급한 표정을 짓는 기사들을 무시한 채로 에이라나는 키라이스트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허약한 놈. 난 허약한 놈은 싫은데 말야. 이 누님이 허약하지 않게 훈련이라도 시켜줘야 하나?”
  그 말에 왠지 오한을 느낀 기사들은 부르르 떨 뿐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모두 일심동체 된 마음으로.
  ‘도련님, 참 성격 더러운 여자에게 붙잡히셨구나!’
  이런 마음만 들뿐이었다.
  키라이스트는 하루 동안 기절해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깨어났다. 어느새 자신의 방에 옮겨져 있는 키라이스트.
  키라이스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으헉!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악몽을 꾼 듯 헛소리를 하며 일어나는 키라이스트.
  역시 악몽을 꾼 것이 맞는 듯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헉! 헉! 헉!”
  키라이스트는 헉헉거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말했다.
  “너무도 끔찍한 꿈이었어.”
  키라이스트는 꿈에서 에이라나가 자신과 함께 한방에 들어왔던 꿈을 꾸었다. 에이라나가 잠시 침대에 누웠다가 잠든 틈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꿈에서 그녀에게 키스를 한 것이다.
  그렇게 슬쩍 키스를 하며 꿈에서 눈을 감았던 키라이스트.
  그런 자신의 행동을 이해 못하며 꿈속에서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키라이스트였다.
  그리고 슬쩍 눈을 떴을 때,
  ‘히익!’
  키라이스트는 당장 물러나야 했다.
  왜냐?
  에이라나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은발에 은안은 어디가고 흑발에 흑안이 되어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키도 조금 커진 듯하고, 이십대 초반의 외모로 변해 있었던 에이라나였다. 그리고 봉긋 솟았던 가슴도 없어져 있었다.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에이라나를 보며 찔끔한 키라이스트.
  ‘누, 누나... 있잖아... 나도 모르게... 미, 미안해.’
  꿈속에서 키라이스트가 애원했다.
  하지만 그런 키라이스트를 향해 발길질을 하는 에이라나!
  그리고 꿈속에서 에이라나가 했던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감히 누구 더러 누나라는 거야? 씨파! 내가 여자로 보여? 죽을래? 나 남자거든? 그리고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그리고 감히 남자 주제에 나 천마교의 소교주 하유현의 입술을 훔치다니! 뒈지고 싶어 환장했군!’
  그리고 이어지는 구타.
  ‘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자신!
  정말 엄청 맞았다. 겨우겨우 잠에서 깼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큼 처절하게 맞았다.
  결론적으로 악몽 맞다.
  에이라나가 나온 악몽.
  그리고 다 키라이스트가 잘못해서 생긴 악몽이기도 했다.
  어쨌든 키라이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누나가 맞았었는데, 그리고 왜 남자가 되어 있었지? 그리고 흑발에 흑안? 으음... 천마교는 또 어디지? 어느 신흥교인가?’
  너무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루를 악몽으로 시작한 키라이스트의 머릿속은 복잡 그 자체였다. 하지만 키라이스트가 어떻게 알았을까?
  이 일이 진짜로 실현될 거라는 것을.
  에이라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지금 에이라나의 몸속에 느껴지는 마나의 덩어리는 두 개였다.
  하나는 성룡이 되면서 모으기 시작해 이제 삼갑자 반이 되어 있는 내공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성룡이 되면서 에이라나의 드래곤 하트에 모인 마나는 내공으로 따지면 거의 사갑자 수준의 내공이었다. 내공과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합체면 팔갑자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였다.
  다시 말해 에이라나의 마나는 거의 윔급 드래곤의 마나에 조금 안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드래곤 하트에 마나가 다 떨어지면 단전의 내공을 드래곤 하트로 끌어다 마나로 변형시켜 쓰면 되고, 단전의 내공이 다 떨어지면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끌어다 내공으로 변형시켜 쓰면 된다.
  한마디로 기가 거의 자신 또래 드래곤들의 두 배라고나 할까?
  어마어마하게 강하다고 보면 되었다.
  눈을 감고 있던 에이라나가 슬쩍 눈을 떴다.
  두근!
  “응?”
  그때 갑자기 자신의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심장을 자극하는 것을 느낀 에이라나였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북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라나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그리고 뭔가...”
  에이라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가 다시 꿈틀대며 말했다.
  “이 재수 없는 느낌은?”
  에이라나가 으르렁거렸다.
  “아~ 갑자기 왜 이런 짜증나는 느낌이 드는 거지? 확 한 놈 잡고 패고 싶은 느낌이.”
  갑작스럽게 짜증 게이지가 풀로 차버린 에이라나. 고로 지금 에이라나의 상태는 위험했다. 잘 느껴지지도 않던 진득한 마기까지 피어 올렸다. 그러다가 곧 그 짜증나는 느낌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짜증나는 기분이 가시지는 않은 상태였다.
  한숨을 푹 쉰 에이라나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였지?”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기운에 슬쩍 얼굴을 찌푸린 에이라나.
  한편 짜증도 났다.
  가부좌를 틀던 에이라나가 일어나며 말했다.
  “에잉~ 짜증나.”
  이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가 샤워실로 들어갔다. 에이라나가 무엇보다 리샨 대륙에 만족하는 것은 샤워 시설이었다.
  목욕이나 샤워를 할 때 물을 직접 떠오지 않아도 물을 끌어다 쓰는 장치 때문에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왔다.
  그리고 뜨거운 물까지 나왔기에 더더욱 좋았다.
  수도꼭지를 틀어 차가운 물로 짜증나는 느낌을 모두 날려버리는 에이라나였다.
  샤워를 끝내고 대충 가운으로 몸을 가린 에이라나가 머리를 털면서 밖으로 나왔다.
  “아~ 짜증은 가셨지만 그래도 찜찜해 죽겠네. 도대체 뭐였지? 어디서 많이 느껴본 것 같은데?”
  아직도 찜찜함을 느끼는 에이라나였다.
  머리를 다 말린 에이라나가 그렇게 옷을 갈아입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일어나셨어요?”
  데르나 공작가에서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 에이라나였다.
  키라이스트의 방 바로 옆에 좋은 방은 물론 시녀까지 딸렸다. 에이라나의 방에 배정된 시녀는 12살 정도의 어린아이였다.
  시녀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아, 일어났어.”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꽤 예쁘장하게 생겼고 갈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커다란 눈동자를 가진 엄청 깜찍한 여자 아이였다. 어제는 아이를 스치듯 어두울 때 봤기 때문에 제대로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한 에이라나였다.
  아이도 에이라나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도 어제 에이라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아이에게 생긋 웃어준 에이라나가 말했다.
  “수고해.”
  “아, 예,”
  갑작스러운 에이라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가 곧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를 보며 피식 웃은 에이라나가 밖으로 나갔다. 아이는 그녀가 자고 일어난 자리를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깨끗했다.
  결국 할 일을 잃은 아이는 그냥 조금 구겨진 이불을 펴고 대충 정리만 하고 나왔다.
  에이라나는 밖으로 나왔다가 키라이스트 방 앞에 있는 시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물었다.
  “뭐야? 키라이스트 아직도 안 일어났나?”
  에이라나의 물음에 방문 앞에서 대기하던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피곤하셨나 봅니다.”
  아니 그것보다 에이라나가 기절시켜서 그럴 것이다.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허약한 녀석.”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가 1층 정문으로 내려갔다.
  키라이스트와 에이라나가 있는 방의 층은 3층이었다. 다시 말해 제일 위층인 것이다.
  1층으로 내려온 에이라나가 정원으로 나갔다.
  아직 7시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에이라나가 검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한 곳에서 검을 뽑았다.
  저택의 정원 중 멋진 곳으로 손꼽히는 곳, 바로 키라이스트와 에이라나의 방 테라스 앞이었다.
  그리고 슬쩍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아침에 일어나 검을 휘두르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다가 검무를 추기 시작하는 에이라나.
  부드러웠다.  그리고 빠르고 강하고 날카로웠다.
  검의 대표적인 강, 유, 쾌, 환. 이 네 가지가 섞인 검무.
  지금 에이라나의 영역 안에 들어간다면 사정없이 난도질당해 죽을 것이었다.
  아름다운 검무를 추는 에이라나는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족이 춤을 추듯이 아름다웠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검무를 추던 에이라나가 갑자기 멈췄다.
  “뭐야? 뭘 훔쳐봐?”
  에이라나가 힐끔 테라스에 나와 있는 키라이스트를 보며 물었다.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왜 아침부터 검무를 추고 그래?”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오랜만에 아침에 검 좀 휘둘러 봤다. 잘못 됐냐?”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일어났으면 나오던가? 밥은 언제 먹냐?”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어? 조금 있다가. 기다려 봐, 지금 내려갈게.”
  키라이스트가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에이라나는 다시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사실 이런 에이라나의 검무는 찜찜함을 날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 * *
  검을 휘두르는 에이라나의 옆으로 키라이스트가 다가왔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키라이스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누나는 이래서 강하구나.’
  자신이 보기에 에이라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면 빨려 들어가 찢겨 죽을 것만 같았다.
  멀리서 대충 봤을 때는 그저 검무를 추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느껴지는 곳으로 다가가자 섬뜩함에 등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묵묵히 검을 휘두르던 에이라나가 검을 멈추며 말했다.
  “내려 왔냐?”
  에이라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응, 나도 검술 훈련을 해!”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흐응~ 훈련은 새벽과 밤에 하는 게 가장 좋을 거다. 새벽이나 밤은 마음이 평온해지거든.”
  낮은 기운이 가장 활발할 때다. 그렇기에 몸을 수련하는 데는 낮이 최고였다.
  하지만 기운이 너무 활발하여 정신적인 수련은 별로였다.
  그렇기에 에이라나 같이 경지에 든 고수는 새벽이나 밤에 수련을 많이 했다. 뭐, 그렇다고 낮에 안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 에이라나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누나.”
  “응?”
  키라이스트의 부름에 고개를 갸웃하는 에이라나.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누나는... 얼마나 강해?”
  갑작스러운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곧 피식 웃는 에이라나.
  하지만 그런 에이라나의 반응에도 키라이스트는 진지할 뿐이었다.
  “큭, 내가 얼마나 강하냐고?”
  에이라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키라이스트.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에이라나가 말했다.
  “글쎄... 그래, 다른 건 몰라고 검술로는 대륙 최강이라고 말해주지.”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다.”
  돌아보는 에이라나를 보며 키라이스트는 눈을 크게 떴다.
  에이라나의 표정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 최강이라는 눈빛이었다. 오만해 보이겠지만 잘 어울렸다.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대, 대륙에는 그랜드소드마스터도 넷이나 있어! 이렇게 그랜드소드마스터들이 한꺼번에 나온 건 대륙 역사상 처음이야. 그리고 소드마스터들도 백이십이 넘어!”
  횡설수설하는 키라이스트.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물었다.
  “그 그랜드소드마스터들은 모두 인간들이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키라이스트.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로카나라고 들어봤냐?”
  그 말에 당연하다는 듯 키라이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엘프이긴 하지만 대륙 최강의 검사를 자칭하는 십강들 중 가장 강하다는 사람이잖아?”
  대륙에 알려진 그랜드소드마스터는 모두 열이다.
  물론 살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수이다. 어쨌든 그중 넷이 인간이고 여섯이 유사인종이었다.
  그중 파괴의 로카나는 십강들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실력자였다. 십강은 십인의 강자를 뜻한다.
  그중 일곱의 무기가 검이고 둘이 창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라운 파이터.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아~ 그 귀쟁이가 대륙 최강의 검사라고? 흐응~ 그럼 알만하군.”
  그 말에 멈칫한 키라이스트가 물었다.
  “누나, 로카나와 만난 적 있어?”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옛날에 한 번 만난 적 있지.”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그랜드소드마스터를 직접 만나다니! 그것도 가장 강한 로카나를! 난 아직 그랜드소드마스터분들을 만나 뵌 적 없는데!”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에이라나가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왜, 왜 웃어?”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에이라나를 보며 당황한 키라이스트.
  잠시 동안 쿡쿡거리던 에이라나가 진정하며 말했다.
  “아, 아니... 킥킥킥... 웃겨서... 너 그랜드소드마스터 만난 적 없어?”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뭐야? 누나, 지금 유치하게 그런 걸로 날 놀리는 거야?”
  그 말에 에이라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보고 있잖아?”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뭘?”
  그런 키라이스트의 퉁명스러운 행동을 보고 빙긋 웃은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랜드소드마스터.”
  “엥?”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키라이스트.
  “누가? 누나가? 그랜드소드마스터?”
  “아, 자세히 말하면 현경이라고 해야겠지만 이곳에선 그것이 그랜드소드마스터니.”
  현경도 보통 현경이 아닌 현경 끝을 보고 있는 에이라나다.
  에이라나는 마나와 내공량은 윔급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응용한 공격은 더욱 파괴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거짓말.”
  퍽!
  그러자 바로 웃는 얼굴로 주먹을 날려주는 에이라나.
  “커억!”
  머리를 가격당한 키라이스트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믿든 말든 상관 않지만 기분이 조금 나쁘네.”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당연하지! 소드마스터면 몰라도! 그 나이에 그랜드소드마스터라니! 가능... 억!”
  퍽!
  다시 뛰어올라 턱을 가격한 에이라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놈아... 내 나이가 딱 500이다.’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반발했다.
  “왜 때려? 커억!”
  퍽!
  반발하는 키라이스트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에이라나의 주먹.
  키라이스트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런 그를 보며 에이라나가 다시 스윽 하며 손을 올렸다.
  “누나 미안해!”
  그러자 바로 잘못했다고 비는 키라이스트였다.
  “쯧... 입조심해야 더 오래 살지.”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속으로 서럽게 울었다.
  ‘흑흑흑... 사람을 막 패... 내가 틀린 말 했나?’
  그 말을 들으면 당장 주먹이 날아올 것이다.
  키라이스트의 말은 대륙에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중원에서는 다른 것이었다. 사실 에이라나도 하유현이던 시절, 어릴 적부터 무공을 배웠다면 아마 현경의 반열에 올라 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부랴부랴 배워서 어릴 때부터 배워 온 마교 최고의 귀재였던 사무연을 뛰어 넘은 게 바로 에이라나였다.
  그만큼 엄청난 귀재라는 뜻이었다. 고로 키라이스트의 말은 에이라나의 입장에서는 틀린 말이었다.
  아무리 500년을 리샨 대륙에서 살고 그에 걸맞은 지식을 쌓았다고 하나 아직 대륙을 돌아다녀본 적 없는 에이라나였다.
  그렇기에 아직 중원의 사상을 중시하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의 구타(?) 때문에 키라이스트가 인정했다.
  “아, 알았어! 누나는 그랜드소드마스터가 맞아!”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이야~ 이거 삐딱하게 말하는 것 좀 보게?”
  그 말에 움찔하는 키라이스트였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피식 웃은 에이라나가 말했다.
  “뭐, 일단 믿는다니... 봐주지.”
  아주 당당한 에이라나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라나가 말했다.
  “아~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리고 몸을 돌렸다.
  “누나, 같이...”
  에이라나를 따라가려던 키라이스트가 그만 발을 헛디뎌 엎어지고 있었다. 에이라나도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휘청거리자 의아해하며 뒤돌아 봤다. 뒤이어 키라이스트를 피하려고 했다. 자신 쪽으로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덥석!
  키라이스트가 에이라나의 어깨를 붙잡았고 당연히 그녀도 같이 쓰러졌다.
  철푸덕!
  결국 둘 다 쓰러졌다. 하지만 정말 우연치 않게 넘어지면서 에이라나와 키라이스트는 입술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침묵.
  키라이스트는 동시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슬쩍 입술박치기 된 에이라나와 자신의 입술을 떼며 키라이스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누, 누나 미안.”
  “비켜.”
  “으, 으응...”
  키라이스트는 얼른 에이라나의 위에서 내려왔다.
  에이라나는 일어서서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오싹함을 느끼는 키라이스트!
  “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우연치 않게 날 잡아 같이 쓰러진 건 용서해줄 수 있어. 하지만 내 입술에 입술 박치기를 한건 죽어도 용서 못한다.”
  “아니... 그, 그건 실수...”
  “그리고 내 입술에 입술 박치기를 한 건 용서할 수 있어도 혼자서 넘어질 것이지 날 잡아서 같이 쓰러진 건 죽어도 용서 못한다.”
  상당히 모순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뭘 해도 ‘넌 내 손에 죽었다’ 이 소리였다.
  “누, 누나... 정말 실수였어!”
  “감히 나 마교의 소교주 하유현을 넘어뜨린 것도 모자라 입술까지 훔친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상당히 열 받아 있던 에이라나. 그리고 오늘 아침 엄청난 짜증남을 동반시켰던 것이 지금 터졌다.
  참 기막힌 타이밍에 정말 재수 없는 키라이스트였다.
  “그, 그게...”
  이성이 끊어져 전생의 자신의 직위와 이름을 말하며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에이라나.
  키라이스트는 이것도 꿈이 아닌가 생각하다가 날아온 에이라나의 주먹에 죽도록 얻어터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딱 죽지 않을 정도만 맞아라!”
  결국 아침의 꿈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반죽음.
  오늘 아침 키라이스트는 반죽음 상태까지 신나게 에이라나에게 얻어터지고 말았다.
    무술대회
  따각! 따각! 따각!
  데르나 공작가의 마차가 아투아로 향하고 있었다.
  아툰 제국의 수도 아투아.
  키라이스트나 데르나 공작. 공작 부인은 아들의 방학을 맞아 잠시 영지에 내려왔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방학이 끝나가니 이제 수도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기에 지금 호위기사, 병사들과 같이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에이라나도 함께였다.
  에이라나는 무료한 듯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하암~ 심심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에이라나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아~ 방학 끝나면 지긋지긋한 학교에 다시 가야겠지? 슬프도다, 학생의 인생은!”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학교라는 데가 그렇게 싫으냐?
  “응.”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일말의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아르카아 공작이 말했다.
  “그래도 가야 하지 않느냐.”
  그 말에 얼굴을 찡그리는 키라이스트.
  “우리 학교는 명문 학교인데, 너무 스케줄이 꽉 짜여 있어서 문제야. 다 좋은데 그게 마음에 안 들어.”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난 10살 때부터 검술만 죽어라 배웠다. 그때 스승님과 대결하면서 반죽음까지 얻어터지는 건 예사였고, 체력 훈련한답시고 맹수가 우글거리는 산에다 날 갖다 버린 뒤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고, 절벽 위에서 던진 적도 있어. 아, 뱀 굴에 던진 적도 있다. 넌 양호한 거야.”
  그 말에 침묵이 찾아왔다.
  키라이스트도, 아르카아 공작도 굳었다.
  “진짜?”
  키라이스트는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라나.
  “진짜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어?”
  “잘.”
  그리고 대화의 장이 끝이 났다. 위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래서 전생의 하유현 시절에 몸에 상처나 흉터가 많았었다. 물론 현경의 경지에 도달하면 환골탈태를 해서 그런 것이 없어졌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에 아르카아 공작이 어색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수도에서 무술대회가 열린다는군.”
  “무술대회?”
  아르카아 공작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이라나.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아르카아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래. 무술 대회, 많은 용병들을 비롯한 기사 등 실력자들이 몰려들 거야. 자네 정도 실력이면 우승도 노려볼 만할 거고. 우승자는 1,000골드의 상금과 백작의 작위를 준다더군.”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와~ 누나 정도면 우승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에이라나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관심 없어요.”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설득했다.
  “그래도... 강자들이 많이 나올 것인데.”
  아르카아 공작은 에이라나가 우승해서 백작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그녀는 강했다.
  그리고 막 나가는 것 같아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움직인다.
  늘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어딘지 모르게 기품도 있어 보였다.
  바로 키라이스트의 신부로 점찍어두고 있는 것이다.
  뭐, 에이라나 정도의 실력자라면 바로 귀족이 될 수 있지만.
  하지만 본인은 정작 작위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은근히 자신의 가문과 이어졌음 하는 아르카아 공작이었다.
  “글쎄요, 정 그렇다면 나가보죠.”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하지만.
  “아, 그래도 우승해서 작위 받으면 귀찮으니깐 작위는 거절할 수 있죠?
  그 말에 바로 얼굴이 굳어진 아르카아 공작.
  “거절할 수... 있다네.”
  아르카아 공작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작위같은 것은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수도까지 가는 데는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
  그것도 사실 출발할 때 마법사들을 모두 모아 워프 게이트로 거리를 반으로 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도에 도착한 데르나 공작가.
  그들은 데르나 공작 저택으로 향했고 오자마자 바로 여독을 풀었다.
  에이라나는 거의 키라이스트의 누나로 자리매김을 한 상태라 아르카아 공작과 오르나 공작 부인도 편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의 배려 때문에 에이라나는 생각보다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식사에 에이라나도 같이 참석했다.
  뭐, 늘 같이 하기는 했지만.
  딸깍! 딸깍!
  묵묵히 식사를 하는 에이라나.
  그런 에이라나 옆에서 역시 식사를 하는 키라이스트와 상석에서 조용히 식사하는 데르나 공작. 그리고 빙긋 웃으며 역시 조용하게 식사하는 아름다운 오르나 공작 부인.
  너무 조용했다.
  다들 식사에 집중하고 있을 때 에이라나가 슬쩍 얼굴을 찌푸리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저... 공작님.”
  “응? 왜 그러는가?”
  식사 시간에 에이라나가 입을 먼저 여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 공작을 보며 에이라나가 물었다.
  “수도에서 가장 강한 자는 누군가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아르카아 공작.
  “글쎄,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해야 아프카레아나큰 후작과 아겔 후작, 아그롤 후작, 이 셋밖에 없지. 그중 아프카레이나큰 후작은 그랜드소드마스터 초급이지.”
  그 말에 에이라나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아니군.”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아르카아 공작.
  “뭐가 말인가?”
  그 말에 에이라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속은 달랐다.
  ‘누구지? 수도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짜릿짜릿하게 만들 정도로 전율을 흐르게 했던 이는? 이 정도면 검술로만은 나와 비슷하거나 하수인데.’
  그렇게 슬쩍 얼굴을 찌푸리는 에이라나.
  검술로 에이라나와 맞먹는 괴물.
  그렇다면 웬만한 성룡은 검술로 그 존재와 붙는다면 바로 세상 하직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지금 이 아투아에 있었다.
  수도에 발을 붙이자마자 느낀 것은 기세였다.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경지에 이른 에이라나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상당히 강력한 기세였다. 그런 기세는 아주 강자의 것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힘인 것이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에이라나였기에 그녀는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도대체...’
  흠칫!
  에이라나가 막 수도에 막 발을 붙였을 때였다.
  어느 구석진 골목길에 한 존재가 거한을 앞에 세워두고 있었다. 막 자신에게 시비를 걸려던 거한을 두들겨 패려던 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나서 조금 기세를 일으켜 그를 겁을 주어 쫓아내려 했는데, 그 기세를 느끼지도 못했는지 계속 알짱거리고 있는 녀석을 패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기운.
  ‘나 이상이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자!
  분명 이곳에 있었다.
  그것도 보통 강한 자가 아닌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기세... 어디서 느낀 적이 있는데...’
  분명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기세였다.
  ‘도대체...’
  그리고 순간.
  두 사람! 에이라나와 그는 동시에 생각했다.
  ‘좋다! 무술대회인가 뭔가에 나가보는 거다!’
  그렇게 서로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에이라나는 식사를 끝냈다.
  “패지마. 그 녀석 벌써 기절했어.”
  그는 자신의 일행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일행 손가락으로 자신이 멱살을 잡고 있는 거한을 가리키자 거한을 던져버렸다. 너무 강한 압력에 기절해버린 거한이었다. 그는 그렇게 거한을 휙 던져버리고 쫄래쫄래 자신의 일행을 따라갔다.
  달빛에 비친 그는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밤하늘을 찍어 바른 듯한 허리까지 오는 흑발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 1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사람.
  에이라나는 묵묵히 소파에 앉아서 시루가 내어주는 차와 과자를 먹으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시루는 공작령 때부터 에이라나의 시중을 들던 아이의 이름이었다.
  시루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에이~ 아침부터 과자 먹으면 살쪄요!”
  에이라나가 편하게 대하라고 했다.
  만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 갔으니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편하게 대하라고 했으니 이 정도면 당연한 것이었다.
  시루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안 쪄.”
  그리고 홍차를 마셨다. 홍차는 아주 시원했다.
  그때였다.
  우당탕탕!
  “응?”
  갑자기 아래쪽에서 엄청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야! 키라이스트! 나 왔어! 아직까지 자냐?”
  뭔가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또 울려 퍼지는 여자애의 목소리.
  “아침부터 소리 좀 지르지 마.”
  “뭐 어때? 여긴 우리 집이나 마찬가진 걸?”
  누군가 티격태격하는 소리.
  그리고.
  “캭! 너희들, 왜 아침부터 찾아와서 난리야? 어? 그리고 아레인! 내 방 어지르지 마! 어어어? 야! 떠들지 마!”
  아침부터 아주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에이라나의 이마에는 십자 마크 하나가 빠직 하고 생겼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움찔한 시루.
  시루는 에이라나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에 시끄럽게 하는 건... 어느 정도 선까지는 봐주지만 저 정도까지는 절대 안 봐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예전에 키라이스트가 아침에 에이라나가 기분 좋게 자고 있을 때, 데르나 공작가에 속한 연금술사가 만든 시약을 잘못 터트려 그녀의 잠자는 시간을 방해해 그가 엄청 맞은 것을 봤기 때문에 잘 알았다.
  지금 소리 지른 것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에이라나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에이라나를 말리지 못하고 시루는 슬쩍 귀를 막고 쭈그려 앉았다. 다음에 이어질 참사의 소리조차 듣기 싫어서.
  쾅!
  에이라나가 방문을 발로 걷어차고 나갔다. 그리고 방 밖에서 떠들고 있던 다섯 명의 소년들과 소녀들의 시선이 에이라나 쪽으로 모였다.
  키라이스트를 제외하고는 에이라나의 외모에 멍해졌고 키라이스트의 안색은 창백, 그 자체가 되었다.
  키라이스트는 아침부터 찾아온 자신의 친구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들이 찾아와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딱딱하게 굴었다.
  그리고 조용히 하라고 경고를 해주었다.
  하지만.
  쾅!
  큰 소리와 함께 에이라나가 머물고 있는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에이라나가 나왔다. 그 모습에 꼭 사신의 모습을 보는 듯한 키라이스트였다. 친구들은 에이라나의 모습에 멍해져 있었지만, 자신은 오직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키라이스트의 귓가로 들리는 목소리.
  “내가 아침에는 떠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일정수위를 넘기면 어떻게 되는지 지난번에 몸소 체험한 걸로 알고 있다만?”
  “아, 아니... 누나, 저 그게 있잖아...”
  방긋 웃으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죽고 싶지?”
  “쿨럭!”
  그 말에 헛기침을 하는 키라이스트.
  그러다가 친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난 안 떠들었어! 이것들이 떠들었단 말야!”
  “마지막에 큰 소리 친 거 다 들었거든?”
  에이라나가 아침에 떠드는 걸 싫어하게 된 계기는 별것 없었다. 바로 에랴나니스 때문이었다.
  에이라나가 아침에 레어 안에서 마법을 사용하다가 엄청난 폭음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때 단잠을 자고 있던 에랴나니스가 엄청 열받은 나머지 에이라나를 마구 패버렸다. 물론 우연히 찾아온 레랴나스에게 걸려 에랴나니스는 레랴나스에게 마구 맞았지만 말이다.
  그 날 이후 본능적으로 아침에 시끄러운 것을 꺼리게 된 에이라나였다. 결국 이 일의 원인은 에랴나니스였다.
  하지만 몇 백 년 동안 조용했기 때문에 괜찮아졌다.
  단, 어릴 때 에랴나니스의 눈치를 살피느라 자동적으로 일정수위 이상으로 시끄러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어 그 이상 떠들면 짜증이 생기는 에이라나였다.
  아침에 아직 비몽사몽인데 큰 소리로 떠드는 걸 누가 좋아하겠는가?
  키라이스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있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도 아까 가장 큰 소리를 냈던 아레인이란 미소년이 키라이스트에게 물었다.
  “키라이스트, 누구야? 저 엄청 예쁜 애는?”
  “닥치고 좀 있어!”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소리쳤다.
  그 말에 아레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침에 왔다고 이렇게 화내는 게 어디 있냐? 우린 네가 왔다고 해서 놀러온 거라고!”
  “캭! 좀 떠들지 말지!”
  물론 잠자던 도중에 일어난 게 아니라 그렇게 짜증낸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어제 의문의 강자의 등장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에이라나였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했던 기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뭐지?’ 라고 생각할 때 방해 받아서 짜증이 배가 된 것이었다.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난 잠자는 걸 방해받는 것보다 뭔가 중요한 걸 생각할 때, 그리고 거의 생각났을 때, 시끄러운 소리에 의해 방해받았을 때가 제일 화나더라?”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잠시 침묵하더니 소리쳤다.
  “죽고 싶지 않음 튀어라!”
  그 말에 영문을 모르던 키라이스트의 친구들.
  하지만!
  “내 생각을 방해한 대가로 좀 맞아라, 이것들아!”
  “헉!”
  “뭐, 뭐야?”
  “꺅!”
  갑작스럽게 어디서 났는지 몽둥이 하나를 들고 달려오는 에이라나를 보고 기겁한 그들은 키라이스트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아레인과 티격태격하던 에르인이 키라이스트에게 물었다.
  “저, 저 사람 누구야?”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일단 맞으면 반죽음이야! 누나는 여자라고 안 봐줘!”
  그 말에 안색이 더욱 창백해진 에르인과 또 다른 여자인 루리아. 말 그대로 에이라나는 여자라고 안 봐주는 성미였다.
  남자애 셋과 여자애 둘이 한 여자에게 도망치는 장면은 참 웃기기도 한 장면이었다.
  * * *
  아르카아 공작은 자신의 아내인 오르나와 같이 티타임을 가지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호호! 아이들이 놀러온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오르나.
  그런 오르나를 보며 아르카아가 말했다.
  “훗,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소꿉친구들이니.”
  그러다가 시끄럽게 소란을 떨자 아르카아 공작은 피식 웃었다.
  “역시, 저 애들이 놀러오면 항상 소란스럽군.”
  하지만 그런 공작과는 다르게 오르나의 얼굴은 결코 좋지 못했다.
  “저 만약에 에이라나가 자고 있다면...”
  오르나는 에이라나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키라이스트가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있었지만 오르나 역시 에이라나가 마음에 들었다. 조금 막나가는 경향이 있지만 호감 가는 성격임은 틀림없었다. 공작도 같은 생각이었다.
  빙긋 웃고 있던 공작의 얼굴이 오르나의 말에 굳어버렸다.
  “어쩌죠.”
  “으음.”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 들리는 소리.
  공작과 공작 부인이 그렇게 우려하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고 싶지 않음 튀어라!”
  아들의 목소리였다.
  그 말에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아르카아 공작.
  그리고 한숨을 폭 쉬는 오르나 공작 부인이었다.
  “역시나... 그래도 활기차서 좋군요.”
  한숨을 쉬다가 생긋 웃는 오르나.
  그런 오르나를 보며 아르카아 공작이 말했다.
  “난... 살벌해서 무섭다오.”
  아르카아 공작은 키라이스트가 살아남기를 간절하게 빌 뿐이었다.
  ‘키라이스트와 그들의 친구들은 도주에 성공했다’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결국 정원으로 나갔다가 몇 분도 안 돼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특히 남자 세 명은 이 세계에는 없지만, 일명 오토바이 자세를 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손을 들고 있었고.
  묘한 압박감에 그들은 에이라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 맞는 것보단 이게 좋지?”
  “마, 맞는 게 더 나, 나아...”
  십 분 동안 이 자세를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잘 알겠지만, 혹 안 당해본 자들은 모르겠지만, 한 오 분만 이러고 있어도 거의 숨쉬기가 힘들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려 십오 분 동안 끙끙거리는 그들을 보며 꺼낸 에이라나의 한 마디에 키라이스트가 대답했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빤히 바라보던 에이라나가 손을 들고 낑낑대는 여자애들을 보며 말했다.
  “거기, 손 내려.”
  “푸아!”
  “사, 살았다.”
  귀하게 자라온 그녀들이 언제 이런 일을 당해 봤겠는가?
  그녀들은 손을 내리는 순간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들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징징대면 저 녀석들이랑 똑같이 만들어줄 줄 알아라.”
  그러자 침묵이 흘렀고, 에르인이 막 소리치려고 할 때였다.
  “난 귀족 같은 거 상관 안 쓰니깐 따지지 마. 너희들이 귀족이든 왕이든 나하곤 상관없어.”
  그 말에 바로 입 다무는 에르인이었다.
  왠지 대들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오 분 정도가 더 지났다.
  결국 키라이스트를 제외한 아레인과 나머지 한 아이가 쓰러졌다.
  “난 못해!”
  “왜 우리가 이런 걸 해야 해?!”
  그런 그들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쯧... 체력도 약한 것들, 그러고도 니들이 검을 쓰는 놈들이냐?”
  에이라나가 쓰러진 두 소년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자 얼굴이 붉어지는 두 사람.
  “야, 너도 자세 풀어.”
  에이라나가 무심한 표정으로 키라이스트에게 말했다.
  그러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던 키라이스트도 자세를 풀고 쓰러졌다.
  숨을 고른 아레인이 소리쳤다.
  “젠장! 왜 내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야!”
  갈색 눈동자에 살기를 번뜩이며 말하는 그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기겁했다.
  “헉! 야! 그, 그렇게 대들...”
  하지만.
  퍼억!
  “커억!”
  역시나 에이라나는 가볍게 자신의 발을 아레인의 배에 정확하게 꽂아버렸다.
  그러자 공중에 붕 뜬 아레인.
  쿵!
  결국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감히 평화로운(?) 나의 아침을 방해했으면서 그딴 소리를 지껄여?”
  스산하게 중얼거리는 에이라나.
  하지만.
  “저, 저기... 기절했는데요.”
  아레인과 키라이스트와 같이 오토바이 자세를 취했던 하늘색 머리 소년의 말에 코웃음을 치는 에이라나.
  “흥, 겨우 그 정도로 기절하다니.”
  ‘날아갈 정도로 사람을 발로 차면 당연히 기절하지!’
  모두의 머릿속에는 이 말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무리 현경에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남의 속마음을 읽을 능력은 없는 에이라나였다.
  결국 아침부터 고문(?)을 당한 키라이스트와 그의 친구들.
  결국 모두가 잡힌 곳에서 키라이스트는 신경이 날카로운 에이라나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누나, 이쪽은 아로픈 공작가의 자제들이야. 보다시피 똑같이 생긴 이란성 쌍둥이지. 생김새는 같아도 성별이 다르니까.”
  키라이스트가 하늘색 머리에 푸른빛 눈동자를 가진 똑같이 생긴 소년과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기절해 있는 녀석은 메르푼 후작가의 후계자.”
  키라이스트가 에이라나에게 맞아 기절한 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쪽은 오란 공작가의 후계자야. 우리 모두 동갑이야.”
  그 말이 끝나고 잠깐 키라이스트의 친구들을 쓱 쳐다보는 에이라나.
  그러자 그런 에이라나의 눈빛에 움찔하는 일동.
  에이라나는 키라이스트를 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아침에 떠들지 마라? 특히 내가 자거나 아주 중요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방에 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속으로 중얼거리는 키라이스트와 일동.
  시종이 내온 차를 홀짝인 에이라나가 중얼거렸다.
  “아아... 거의 생각날 뻔했는데, 도대체 누구야?”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를 보며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 루리아가 물었다.
  “키라이스트, 누구야?”
  그런 루리아의 물음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글쎄, 나랑 의남매 맺은 사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는 키라이스트.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그녀의 오빠인 루이스가 물었다.
  “의남매? 대체 누구기에.”
  “그냥... 내가 위험할 때 날 구해준 사람이야. 엄청 강하지. 대들지 않는 게 신상에 좋아.”
  마지막 말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에이라나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키라이스트, 대가리 박기 싫으면 그런 소리 자제해라.”
  대가리 박기가 뭔지 잘 안다.
  그렇게 다시 침묵의 시간이 돌 때였다.
  “크윽... 아이구! 배야.”
  아레인이 배를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그런 아레인을 보며 루이스가 물었다.
  “야, 괜찮냐?”
  루이스는 자신의 동생과 쌍둥이라서 딱 여자로 오인하기 좋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루이스의 물음에 아레인이 말했다.
  “크흑... 방금... 뭐였어?”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너, 기절했었다.”
  “뭐?!”
  그 말에 깜짝 놀라는 아레인.
  그리고 키라이스트를 보며 말했다.
  “왜?”
  “맞아서.”
  그 말에 아레인이 벌떡 일어났다.
  “크윽! 그럼 저 여자가 날 발로 찬 게 맞구나!”
  태연하게 에이라나에게 삿대질을 하는 그였다.
  “야! 죽고 싶지 않음 손 내려!”
  키라이스트가 기겁하며 아레인의 손가락을 굽혀 주었다.
  “캭! 너 왜 그래!”
  성격 급한 아레인이 소리쳤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에이라나가 생긋 웃었다.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누, 누나! 얘가 뭘 몰라서 그래!”
  하지만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아레인이었다.
  “크악! 뭘 몰라! 나랑 한 판 붙어!”
  그 말에 에이라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개소리 하고 앉았네.”
  “뭐, 뭣?”
  에이라나의 말에 입을 떡 벌리는 아레인.
  그 순간 계속 앉아 있던 에이라나가 일어섰다.
  “그렇게 맞고 싶냐? 그래 마음껏 패주마!”
  “누, 누나!”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기겁했다. 반면에 아레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계속 도발했다.
  “오냐! 한판 뜨자.”
  “야! 그만해!”
  그 말에 당황하며 키라이스트가 아레인을 말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키라이스트! 연무장 좀 빌리자.”
  “야!”
  아레인은 그런 키라이스트의 말을 무시하고 연무장으로 향할 뿐이었다. 에이라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키라이스트와 아르인과 루이스, 루리아는 그저 당황한 채로 둘의 뒤를 따랐다.
  “진검으로 할 거냐?”
  에이라나의 말에 아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 말하고 연무장 구석에 있는 진검 하나를 들고 연무장으로 올라가는 아레인.
  갑자기 자신들의 소주군의 친구들이 우르르 연무장으로 몰려오자 훈련하던 기사들이 멈칫했다. 그리고 아레인이 검을 들고 연무장에 올라가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줄 알고 눈을 반짝이며 훈련을 멈췄다. 그건 기사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레인은 자신의 소주군과 같은 소드 익스퍼트 중급, 즉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검사다. 일명 검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검사가 올라가자 상대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인 루이스나 키라이스트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웬걸? 어제 키라이스트와 같이 온 여인이 맨손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기사단장은 소드마스터 초급의 경지의 기사로 키라이스트 가족이 방학 동안 영지에 있는 내내 수도 저택을 지킨 자였다.
  그렇기에 에이라나를 잘 몰랐다. 에이라나가 맨손으로 올라오자 눈을 찡그렸다.
  “뭐야! 왜 검 안 들고 와?”
  그런 아레인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너에게는 검 쓰는 것도 아깝다.”
  그 말에 아레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얼굴 붉힐 시간 있음 덤벼.”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의 몸에서 서서히 냉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르르릉!
  아레인이 슬며시 검을 뽑았다.
  자신의 감각이 알려왔다. 눈앞의 여자는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말이다. 바야흐로 에이라나와 아레인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 *
  먼저 돌격한 것은 아레인이었다.
  아레인은 에이라나를 보며 대각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주 빠른 공격이었다.
  하지만 에이라나에게는 아주 느리게 보일 뿐이었다.
  “뭐야? 겨우 이 정도로 한 판 붙자고 한 거냐?”
  아레인을 보며 이죽거린 에이라나는 그의 공격을 몸을 돌려 슬쩍 피했다.
  하지만 갑자기 휘둘러지던 검이 멈추더니 그대로 다시 에이라나를 노리며 휘둘러졌다.
  갑작스런 변화에 에이라나가 멈칫하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오~ 제법이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하지만 그녀는 말과는 달리 너무도 여유로웠다.
  그 말에 이를 부득 가는 아레인.
  그런 아레인을 보며 에이라나가 아레인의 검 등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흘려버렸다.
  그것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레인.
  “야,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다시 발에 걷어차인다?”
  “뭐, 뭣? 커억!”
  퍽!
  어느새 에이라나의 발이 다시 아레인의 배에 꽂혔다.
  “크윽.”
  뒤로 밀려난 아레인이 침음성을 삼켰다.
  지켜보는 이들은 가볍게 그에게 한 방 먹인 에이라나를 보며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맨손으로 진검을 가볍게 흘려버리는 것도 정말 대단했다.
  “라, 라운 파이터?”
  아레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에이라나가 이죽거렸다.
  “미안하지만 난 검사인 걸?”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비틀거리면 큰일 난다?”
  에이라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아레인!
  자신에게 달려오는 에이라나를 보며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찔러들어 갔다.
  하지만.
  휙!
  사뿐!
  에이라나는 가볍게 뛰어 아레인이 들고 있던 롱소드에 사뿐하게 앉았다. 그것을 보고 다시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레인.
  퍽!
  놀랄 틈도 없이 에이라나의 주먹이 아레인의 얼굴에 꽂혔다.
  “컥!”
  짧은 단말마를 흘리는 아레인.
  하지만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서 있었다.
  “이야~ 그 정도 맞으면 머리 띵할 텐데? 맷집 하나는 죽인다?”
  그 말에 아레인은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자~ 계속 덤빌 거냐?”
  그 말에 아레인은 당연하다는 듯 소리쳤다.
  “물론!”
  “쯧~ 미련하기는.”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가 품에서 뭔가를 하나 꺼냈다.
  바로 은선이었다.
  “부채?”
  “응? 너 이 모양의 부채 아냐?”
  에이라나의 물음에 아레인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그건 여자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것 중 하나가 아닌가?”
  그 말에 에이라나가 중얼거렸다.
  “호오~ 언제 퍼졌지? 분명 옛날에는 이런 모양의 부채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바로 에이라나가 옛날에 은아와 흑아를 만들 때 드워프 마을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때 모양이 괜찮다는 이유로 장식용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대륙을 열광시키고 있었다.
  에이라나가 갑자기 은선을 들자 아레인은 더욱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부채는 왜 꺼내드는 거냐?”
  그런 아레인의 말에 에이라나가 이죽거렸다.
  “너, 리샨 대륙에 처음 나왔던 섭선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아냐?”
  그 말에 아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섭선?”
  “아, 이 부채.”
  에이라나가 은선을 쫙 폈다가 접으며 말했다.
  “부채질용이겠지.”
  아레인이 툭 하고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에 에이라나는 혀를 찰 뿐이었다.
  “땡! 검 대용이다.”
  “뭐?”
  당연히 검 대용일 것이다.
  왜냐, 에이라나가 검 대신 사용하려고 만든 게 흑선과 은선이니 말이다.
  에이라나의 말에 아레인이 말했다.
  “그걸 어떻게 검 대신 사용한단 말이냐?”
  하지만 그런 아레인의 말을 에이라나는 씹을 뿐이었다.
  “영광으로 생각해.”
  생긋!
  생긋 웃은 에이라나가 아레인을 향해 은선을 내질렀다. 아레인은 재빨리 양손으로 은선을 막았다.
  챙!
  하지만 드래곤 본, 오르하르쿤, 미스릴로 만들어진 은선이다.
  당연히 강철보다 강도가 강했다. 느껴지는 압박감에 아레인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하지만.
  “크윽... 무, 무슨 힘이.”
  자신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
  에이라나가 한손으로 아레인을 밀어붙이며 초식명을 외쳤다.
  “잘 가라! 천마오환검!”
  에이라나의 초식명에 의해 다섯 개로 늘어난 에이라나의 은선.
  “헉!”
  갑작스럽게 늘어난 은선에 헛바람을 들이키는 아레인.
  그리고.
  퍼버버버벅!
  다섯 개 다 아레인의 몸을 구타하고 사라졌다.
  당연히 아레인은 넉다운 되었다.
  에이라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함부로 까불지 마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레인은 기절했다.
  에이라나에게 신나게 얻어터진 다음 기절해버린 아레인을 보며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에잉~ 겨우 부채에 맞았다고 이렇게 뻗어버리냐?”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키라이스트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기사 일동.
  분명 자신들이 본 것은 환검이었다.
  하지만 다섯 개는 상당히 많은 수의 환검이었다.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에이라나가 최소 백 개가 넘는 환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혀를 찬 에이라나가 아레인의 뺨을 툭 쳤다.
  “야, 언제까지 뻗어있을 거야?”
  하지만 아레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에이라나는 그의 혈도 하나를 짚었다.
  “끄악!”
  그러자 기겁하며 벌떡 일어난 아레인은 잠시 동안 몸을 비비꼬며 소리쳤다.
  “끄아아아! 아, 아프다!”
  에이라나가 짚은 혈도는 엄청난 통증을 느끼게 해주는 혈도 중 하나였다. 아마 아레인은 그녀가 혈도를 짚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프냐?”
  사람들은 에이라나가 그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콕 찔렀는데 아레인이 아프다고 저 난리를 치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이 어느 정도 가신 아레인이 물었다.
  “도, 도대체 뭐야?”
  그런 아레인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아, 그냥 간단한 방법으로 아프게 해줬지.”
  “크윽, 뭐가 간단하다는 거야?”
  그런 아레인의 말을 무시한 에이라나가 말했다.
  “겨우 그거 맞고 기절한 주제에... 쯧.”
  그 말에 얼굴이 빨개지는 아레인.
  그런 아레인을 보며 에이라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너희는 알아서 놀아라. 난 할 일이 있다.”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아레인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야? 저 여자?”
  그건 키라이스트를 제외한 모두의 의문이기도 했다.
  에이라나는 저택으로 들어와 바로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집무실 앞을 지키던 기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안을 향해 말했다.
  “공작님, 에이라나 님이 오셨습니다.”
  그 말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해라.”
  그 말에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고 에이라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며 에이라나가 아르카아 공작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르카아 공작에게서 변화를 느끼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아르카아 공작은 이제 소드마스터 상급이 된 것이었다.
  아르카아 공작이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나?”
  그런 아르카아 공작의 물음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무술대회에 참가할 겁니다.”
  “호오~.”
  에이라나의 단호한 말에 아르카아 공작의 눈이 빛났다.
  그런 아르카아 공작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추천 좀 해주시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추천을 하면 예선전을 치르지 않고 바로 올라갈 수 있다던데.”
  그렇다.
  후작급의 귀족에게 추천을 받는다면 예선 없이 바로 128명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에이라나는 귀차니즘 때문에 바로 본선에 진출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지.”
  그러면서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아르카아 공작.
  그런 아르카아 공작을 힐끔 쳐다본 에이라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초반부터 내가 느낀 존재와 붙는다면 난장판 되겠군.’
  이 세계로 따지면 그랜드소드마스터vs그랜드소드마스터다. 그것도 성룡급의 존재 둘이다.
  말 그대로 초토화다.
  잠시 생각을 하던 에이라나가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경공술을 이용해 벗어나기 시작했다.
  몸을 풀어줘야 한다.
  요즘 몸이 너무 둔해져 있는 에이라나였다.
  키라이스트는 요즘 너무도 심심했다.
  에이라나가 걸핏하면 밖으로 나와 안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의 말로는 훈련을 하러 가는 거라고 하는데, 도대체가 심심해 죽을 것 같았다. 친구들과 매일 놀기는 했지만 뭔가 허전한 것 같은 키라이스트였다.
  오늘도 키라이스트가 투덜댔다.
  “쳇... 갑자기 무슨 훈련을 한다고.”
  사실 간단한 몸풀기다.
  * * *
  평! 평! 평!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무술 대회가 열렸다.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폭죽을 터트리며 무술 대회의 개막을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귀족들의 추천을 받은 이들은 총 10명.
  그러니 예선에서 올라오는 본선 진출자들은 모두 118명으로 줄었다는 이야기였다. 예선에도 수많은 실력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소드마스터도 있을 정도였다.
  에이라나도 슬쩍 예선전을 지켜보았다. 금세 얼굴을 찌푸렸다.
  “흐음~ 나오지 않았나? 아니면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가?”
  에이라나가 중얼거렸다. 아마 실력을 숨기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에이라나가 싱긋 웃었다.
  “이거... 기대되는 걸?”
  이런 긴장감 얼마만인가?
  이 세계에서 태어난 이후 500년 만에 처음이었다.
  에이라나가 싱긋 미소 지으며 사라졌다. 원래 짓지 않았던 것처럼.
  예선이 모두 끝이 났다. 수많은 실력자들이 본선에 올랐다.
  그중 수많은 기사들이 있었고 용병들도 있었다. 또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소드마스터도 여럿 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 본선 첫 경기는 보기 힘든 라운 파이터와 데르나 공작가의 추천을 받은 의문의 여검사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신비주의?
  그렇기에 그 누구도 에이라나의 외모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제외지만 말이다.
  음성 확장 마법을 건 심판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드디어 저희 아툰 제국에서 연 무술 대회의 본선 경기의 시작입니다.”
  “와~.”
  “이 날을 기다렸다!”
  “빨리 시작합시다!”
  심판의 말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말에 심판이 다시 말했다.
  “네, 그럼 첫 번째 경기에 나올 선수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동문! 보기 힘든 라운 파이터, 아르큰 백작가의 후계자인 우리나라 최고의 무투가로 칭송받는 칼런 경이 올라오겠습니다.”
  “와!”
  칼런은 예선전부터 수많은 실력자들을 물리치고 온 사람 중 하나였다. 아르큰 백각가는 평민들에게 꽤 괜찮은 귀족가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에이라나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서문! 이번 무술 대회에서 얼마 출전하지 않은 여검사! 데르나 공작가의 추천을 받은 에이라나 양이 무대 위에 올라오겠습니다!”
  “와~.”
  에이라나가 올라오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가면으로 가리고 있지만 은빛 머리카락에 은빛 가면.
  그리고 오뚝 솟은 콧날에 피를 칠한 것 같은 입술, 갸름한 턱선.
  미녀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기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에이라나가 이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말들이 튀어나왔다.
  “칼런 경! 적당히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미녀입니다 적당히 하십시오!”
  “으하하하하!”
  모두가 칼런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쌍둥이의 아버지인 아로픈 공작이 빙긋 웃으며 아르카아 공작에게 말했다.
  “자네, 무슨 생각으로 저 여자를 추천한 건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강해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 말에도 아르카아 공작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때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아버지, 누나 혹시 폭발하지 않을까요?”
  “글쎄다.”
  아르카아 공작에게 있어 에이라나가 폭발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폭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폭발하면 칼런은 무사하지 못했다.
  자신도 그녀의 경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였다. 칼런이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에이라나를 강하게 각인시킬 뭔가가 필요했다.
  에이라나가 중얼거렸다.
  “쯧,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개념이 없고만.”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 의식 속에서 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왜 날 의식 속에 집어넣은 거야? 날 사용해야지! 저런 철 쪼가리를 들고 싸울 생각이야?
  은아의 말에 흑아가 말했다.
  -그건 나도 동감이다.
  흑아와 은아는 삐친 상태였다.
  지금 흑아와 은아는 에이라나의 의식 속, 그러니깐 자신들이 새긴 고유의 문신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에이라나가 자신들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롱소드를 사용한다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좀 좋은 거리면 좋겠지만 투박하기 그지없는 롱소드였다.
  하지만 그건 에이라나가 이 세계에 오면서 처음으로 쥔 검이었다. 그 말에 에이라나가 반박해주었다.
  ‘너희보다는 이 녀석과 더 오래 지냈다고. 이 녀석을 더 많이 사용했고.’
  그 말은 은아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커억! 우리가 이런 철 쪼가리보다 못한다고?
  -언젠가 분질러야겠군.
  둘의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에이라나가 롱소드를 뽑자 투박한 롱소드가 뽑혀져 나왔다. 이어 롱소드를 늘어트리고 칼런을 쳐다보았다.
  칼런은 슬쩍 인사를 해왔다.
  “칼런이라고 하오.”
  그 말에 에이라나가 딱 잘라 말했다.
  “에이라나.”
  그 말에 에이라나를 빤히 바라보던 칼런이 자세를 잡았다. 에이라나는 하단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시작!”
  심판이 시작을 알렸다.
  칼런이 먼저 에이라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에이라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에이라나는 몸을 살짝 숙여 피했다.
  칼런은 다른 주먹으로 자신을 베어오는 롱소드를 향해 내질렀다.
  캉!
  지금 칼런은 넉클을 낀 상태였다.
  무투가, 즉 라운 파이터들은 저렇게 넉클에 마나를 입혀 오러를 만들었다. 맨손에 오러를 만드는 건 복잡한 혈자리를 가지지 않은 그들에게는 불가능했다. 잘못하면 팔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건 드래곤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라운 파이터들은 소드마스터와 거의 맞먹는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팔에 오러를 맺힐 수 있는 존재들을 라운 마스터 파이터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건 그랜드소드마스터들과 맞먹었다.
  힘 대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롱소드에 힘을 슬쩍 푼 에이라나가 칼런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에이라나의 행동에 당황하는 칼런.
  에이라나는 어깨로 칼런의 가슴에 몸통 박치기를 했다.
  퍽!
  “크윽!”
  갑작스러운 에이라나의 행동에 깜짝 놀란 칼런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리고 바로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지르는 에이라나.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칼런이 주먹에 오러 피스트를 불어넣었다. 그것을 보고 에이라나도 검기, 즉 그냥 보통 오러를 주입했다.
  권강과 검기의 대결이다. 당연히 권강이 이긴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달랐다.
  쾅!
  꽤 큰 폭음과 함께 에이라나가 밀려났다.
  하지만.
  퍽!
  “커억!”
  바로 공중에서 자세를 돌려 발로 칼런의 관자놀이를 가격해 버렸다.
  쿵!
  엄청난 충격에 정신을 잃은 칼런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런 칼런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에이라나가 롱소드를 검집에 꽂은 다음 내려왔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심판.
  그러다가 칼런을 보고는 말을 더듬으며 들어가고 있는 에이라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에, 에이라나 승!”
  하지만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칼런을 쓰러트린 에이라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키라이스트와 루리아, 루이스, 아레인, 에르인이 에이라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
  에이라나가 나른한 목소리로 키라이스트를 불렀다.
  “누나.”
  키라이스트가 당황하며 에이라나를 불렀다.
  키라이스트도 에이라나가 그렇게 가볍게 칼런을 제압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아버지도 좀 더 시간이 걸리는 상대를 그렇게 가볍게 제압한 에이라나.
  에이라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다음경기 안 봐?”
  그 말에 아레인이 툭 내뱉었다.
  “칼런 경을 그렇게 가볍게 제압한 사람이 있는데 다음 경기가 눈에 보이겠어?”
  아레인의 말에 에이라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만 한 녀석 이 대회에 한명 더 나왔을 거야. 보는 게 좋을 걸?”
  “뭣?”
  그 말에 아레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에이라나가 말했다.
  “야, 근데 너! 어디서 계속 반말질이야? 그렇게 툭툭 내뱉고, 건방지다? 적어도 날 누나라고 불러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아레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한두 살 더 많은 거 가지고! 누나 운운하냐?”
  그 말에,
  퍼억!
  “커억!”
  바로 배에 발차기를 가격하는 에이라나.
  “난 너보다 나이 먹어도 6살은 더 먹었어.”
  그 말에 아레인이 말했다.
  “그 얼굴에 24살이란 거야?”
  “그래.”
  그 말에 입을 꾹 다문 아레인.
  “까불지 마라?”
  그렇게 중얼거리고 에이라나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레니스?”
  방금 마나가 느껴졌는데 그건 분명 레니스의 기운이었다.
  같은 동족만 알아볼 수 있는 마나.
  “뭐, 무시해도 되겠지?”
  분명 이건 레니스가 에이라나를 겨냥하고 일으킨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걸 싸악 무시하는 에이라나였다.
  “크윽! 이 녀석! 왜 무시하는 거야?”
  레니스가 짜증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륙 최고의 마검사 레니스.
  그는 지금 무술대회를 개최하는 아툰 제국에서 초대한 손님이었다. 그런 그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에이라나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무시할 뿐이었다.
  “크악!”
  레니스는 짜증이 났다.
  칼런을 처리하고 에이라나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것이 우연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음경기 다음경기를 승리해나가며 결승전을 향해 돌진하는 에이라나를 보며 우연이라고 떠들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에이라나는 은빛 가면의 여검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역시 신비주의 전략을 펼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후드와 복면을 쓴 검사였는데 체형으로 보아 18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역시 강자들을 차례차례 격파하며 결승전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은빛 가면의 여검사와 복면 검사의 대결을 기대하고 있었다.
  모두의 바람은 비교적 빨리 이루어졌다. 무술대회 4강에 그 둘이 부딪히게 된 것이다. 4강에 든 자들에게는 모두 상금과 작위가 주어졌다.
  모두가 그 두 사람의 대결에 열광했다.
  “와아아아!”
  “은빛 가면 이겨라!”
  “아냐! 복면의 검사가 이길 거야.”
  관중들 사이에 그렇게 말들이 많았다. 심판 역시 그 둘의 대결을 기대하는지 활기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 강력한 우승 후보들이 안타깝게 준결승전에서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대되는 건 사실이군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환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개할 필요가 없다! 붙어라!”
  두 사람 다 아직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한 적은 없다.
  하지만 모두의 추측으로는 두 사람 다 소드마스터라는 말이 많았다. 그렇게 에이라나와 의문의 복면인이 맞붙게 되었다.
  스릉!
  에이라나가 롱소드를 뽑으며 중얼거렸다.
  “너였구나.”
  하지만 복면인은 이때까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동료가 말하기를 그는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말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슬쩍 고개를 갸웃한 에이라나가 말했다.
  “정체가 뭐지?”
  복면인도 검을 뽑았다.
  복면인도 긴장했는지 자세를 낮추며 에이라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복면인을 보다가 에이라나가 먼저 달려들었다.
  대회가 펼쳐지는 동안 단 한 번도 선공을 펼친 적 없는 에이라나였다. 그렇기에 여기저기서 놀라운 탄성이 울려 퍼졌다.
  캉!
  에이라나의 투박한 롱소드와 복면인의 롱소드가 부딪쳤다.
  까가가가가가각!
  서로가 힘겨루기를 하기 시작했다.
  챙! 캉! 캉!
  여러 번의 주고 받는 싸움.
  꼭 틀에 맞춰진 연극을 보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복면인의 검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개의 환검이 생성되었다.
  그러다가 열 개! 스무 개! 그리고 또 사십 개로 늘어났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저렇게 많은 환검은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에이라나가 경악했다. 그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 전혀 다른 의미였다.
  “남궁세가!”
  그 말에 복면인도 멈칫했다.
  에이라나는 침착하게 자신도 환검으로 맞받아쳤다.
  사십 개의 환검이 정확하게 복면인의 검을 쳐냈다.
  까가가가가가가가가강!
  스걱!
  그리고 조금 멈칫한 틈을 치고 들어가 그의 복면과 후드를 베었다. 그러자 허리까지 찰랑이는 흑발에 흑요석 같은 흑안, 그리고 선이 아주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어떻게 보면 여자로 오인할 수 있는 얼굴이랄까?
  하지만 그 얼굴 역시 에이라나가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복면인의 놀란 눈은 크게 떠진 상태였다. 그는 이어진 에이라나의 중얼거림에 경악했다.
  “남궁휘안.”
  에이라나 역시 상당히 얼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남궁휘안.
  정파 최고의 귀재였으며 정파인들 중에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했던 자신보다 조금 아래, 즉 사무연과 비슷한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던 무공의 천재였다.
  자신과 동갑이었던 남궁휘안이 눈앞에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생의 향기와의 조우였다.
    에이라나vs남궁휘안, 현경vs현경
  휘안이 멍하니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우연치 않게 이 리샨 대륙에 떨어졌을 때 만난 동료들에게 받은 목걸이로 이 대륙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너무도 잘 들렸다. 남궁휘안의 말이.
  그녀는 은발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은발을 가진 사람은 없다. 더더욱 여자는.
  “남궁휘안, 네가 여긴 어떻게...”
  에이라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휘안이 에이라나를 보며 말했다.
  “누, 누구세요?”
  휘안의 말에 에이라나가 쓴 웃음을 지었다.
  “나야.”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슬쩍 가면을 벗었다.
  휘안은 에이라나의 외모를 보고 경악했다. 아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유현!”
  그 말에 에이라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유현이다.”
  휘안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처음 봤을 때 고백했던 사람을 말이다. 물론 그때 죽도록 얻어맞아야 했다.
  그가 남자라는 것을 알았을 땐 경악했고, 마교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지를 한눈에 알아본 유현에게 놀랐다.
  휘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유, 유현이는 죽었는데... 그, 그리고 남자야! 여자가 아니라고!”
  빠직!
  그 말에 에이라나의 이마에 혈관마크 하나가 튀어나왔다.
  “닥쳐! 요즘 성별 때문에 미치겠는데, 네놈까지 내 염장을 지르는 거냐?”
  그 말에 움찔하는 휘안.
  에이라나가 한숨을 푹 쉰 다음 말했다.
  “너, 여긴 어떻게 온 거냐?”
  “으응?”
  에이라나의 물음에 당황하는 휘안.
  그런 휘안을 쳐다보다가 에이라나가 말했다.
  “어떻게 리샨 대륙에 온 거지?”
  그 말에 얼굴을 찡그리는 휘안.
  “호수에 빠졌는데 여기였다.”
  에이라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이가 없군, 겨우 그걸로 차원이동을 했다고?”
  휘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원이동?”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아아... 쉽게 말해 여긴 중원이 아니다. 알고 있지?”
  끄덕!
  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중원이 없다.”
  “뭣?”
  “쉽게 말해, 다른 세계다.”
  그 말에 멍해지는 휘안을 보며 에이라나가 추가타를 날렸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 환생한 거고.”
  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 휘안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여자다. 그리고 자신을 알고 있다. 휘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에이라나가 힐끔 관중들을 쳐다보았다.
  “하아~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일단 이 대결부터 끝내야겠지?”
  그 말을 들은 휘안이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리는 에이라나를 보며 자신도 검을 고쳐 쥐었다. 에이라나가 기세를 피어 올리자 자신도 기세를 피어 올렸다.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유현이 장난기는 많아 보여도 얼마나 냉혹한지.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하는 성격이었다.
  에이라나의 은빛 냉기가 서린 강기를 보며 휘안이 말했다.
  “마기가 아니군.”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아... 내 기운이 빙이라서 말이야. 천마심법을 응용해도 다 이렇게 냉기로 바뀌더군. 뭐 마기도 사용할 수 있지만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뒤 에이라나가 사라지자 휘안은 뒤를 돌아보며 검을 내질렀다.
  쾅!
  은빛 검강과 청은빛 검강이 부딪치며 엄청난 폭음을 냈다.
  “천마참검!”
  에이라나의 초식명과 함께 은빛 반달 검강이 휘안에게 날아갔다. 이에 휘안도 초식을 사용했다.
  “청광검!”
  콰가가가가가강!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럽게 바뀐 기세로 엄청난 공격을 뿌려대기 시작하는 두 사람.
  그것을 보며 모두가 경악했다.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검강 하나하나가 서로를 노리고 들어갔다. 엄청난 속도로 싸우는 두 사람.
  쾅!
  공중에서 부딪친 두 사람이 힘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까가가가가가각!
  불꽃까지 튀기기 시작했다.
  “헤~ 제법인데?”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말했다.
  “중원보다 기의 농도가 두세 배나 되는데 현경의 경지에 안 오르면 바보다!”
  “엥? 중원보다 기의 농도가 두세 배는 높다고?”
  쾅!
  그 말과 함께 서로 다시 경기장에 착지했다. 물론 경기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휘안이 물었다.
  “몰랐냐?”
  “몰랐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그랜드소드마스터...”
  “그랜드소드마스터다...”
  하지만 에이라나와 휘안은 서로 다른 세상에 있을 뿐이었다.
  아프카레이나큰 후작은 얼굴을 굳히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랜드소드마스터들이라니...”
  갑작스럽게 저런 실력자들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자신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실력자들이 둘이나 나와 있었다. 특히 저기 은발을 가진 여인은 데르나 공작가의 추천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분위기로 보아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아는 사이로 보였다.
  “허허, 아툰 제국에 홍복이 내린 것인가?”
  아르카아 공작도 멍하니 웃기만 할 뿐이었다.
  “허허허, 에이라나가 설마하니 그랜드소드마스터일 줄이야. 이건 생각지도 못했군. 그런데 저 흑발의 소년은 누구지?”
  아르카아 공작과 아프카레이나큰 후작을 제외한 모든 귀족은 굳어 있었다.
  한편...
  “저 인간 괴물 아냐? 에이라나랑 검술로 맞먹고 있잖아?”
  크로잉의 공작 레니스 오르 폰트레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이라나와 싸우고 있는 휘안을 보며 말했다.
  “완전 괴물이군. 내가 현신해도 이기기 힘들겠어.”
  자신도 승패를 점하기 힘든 엄청난 괴물이 튀어나온 것이다.
  “쯧, 이쯤에서 끝내자.”
  에이라나가 중얼거렸다.
  휘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머리가 너무 복잡해. 일단 끝내자.”
  휘안의 말에 에이라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의 모든 내공을 롱소드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냉기의 은빛 검강이 서리며 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휘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천마... 너, 날 죽일 작정이야?”
  휘안이 질렸다는 듯 에이라나가 사용할 초식명을 중얼거리자 에이라나가 생긋 웃었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니깐, 그럭저럭 막을 수는 있을 걸?”
  “캭! 악마!”
  소리친 휘안이 자신이 아는 최고의 초식을 준비했다. 청월광 월검의 마지막 초식, 월광! 그것이 휘안이 아는 천마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초식이었다.
  “천마!”
  “월광!”
  은빛 검강과 청은빛 검강이 뒤섞이며 엄청난 폭음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번쩍!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젠장!”
  다른 마법사들이 당황하며 실드를 전개할 때, 레니스도 이런 무식한 공격들을 보고 소리쳤다.
  “그레이트 딕택 실드!”
  8서클 실드마법. 이 중 최고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커억! 쿨럭!”
  레니스는 바로 마나가 역류되어 피를 토했다.
  “헉! 공작님!”
  주위의 크라잉 왕국의 신하들이 당황하며 그를 부축했다.
  “에이라나, 이것아... 작작하란 말이다.”
  레니스는 니글니글한 속을 다스리며 중얼거렸다.
  경기장이었던 곳은 초토화된 지 오래였다. 경기장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왔다.
  “크윽!”
  에이라나가 휘안을 짊어지고 나온 것이다.
  “아야야야, 마지막에 그 화구를 던진 건 반칙이야!”
  “시끄러워. 그럼 내가 지는 게 맞냐?”
  “크윽! 마교의 소교주 아니랄까 봐!”
  “지금은 아냐. 알다시피 난 죽었었거든?”
  에이라나와 휘안은 쓰잘머리 없는 말싸움을 하며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에이라나가 옆에서 멍하니 있는 심판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이겼다.”
  그 말에 어리벙벙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심판이었다.
  “에, 에이라나 승!”
  하지만 그 말에 응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휘안을 짊어지고 나가는 에이라나만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휘안과 에이라나,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이름을 리샨 대륙에 당당히 알렸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이 대륙에 속한 자의 이름이 리샨 대륙을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랜드소드마스터라는 이름
  아툰 제국의 아주 중요한 사항이 있을 때만 열린다는 황궁중앙대회의실. 지금 그곳에 모든 고위 귀족들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모여 있었다. 황제는 당연지사로 있었다.
  “으음, 그 두 사람이 작위를 거절했다?”
  아툰 황제의 말에 회의 사항을 정리하는 오르노 후작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건 전 대륙을 진동시킬 만한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그랜드소드마스터 둘의 출현! 그것도 아직 어린 검사들입니다.”
  그랜드소드마스터 둘의 출현! 바로 에이라나와 남궁휘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틀 전, 아툰 제국의 주체로 한 무술 대회에 두 명의 그랜드소드마스터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새로운 실력자들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20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하프 엘프라는 말도 있었다.
  하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외모는 그런 말이 튀어나오기 충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실력도 실력이었으니 말이다.
  아툰 황제가 얼굴을 찌푸리다 아르카아 공작을 보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은빛 가면의 에이라나는 아르카아 공작의 추천으로 이번 대회에 참가한 게 아닌가?”
  모두가 생각났다는 듯 아르카아 공작을 쳐다보았다. 그런 귀족들의 시선에 아르카아 공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에 아툰 황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 그럼 지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아르카아 공작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저희 집에서 흑안의 검사와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저도 그만한 실력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남궁휘안을 부르는 칭호도 ‘흑안의 검사’로 바뀌어 있었다.
  그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 백작이 말했다.
  “오~ 그거 정말 잘됐군요!”
  그때 아로픈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보게, 그녀와 자네는 무슨 사이인가?”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말했다.
  “내 아들의 생명의 은인이지. 안 지 몇 달 되었고, 내 아들과는 호형호제하고 있고... 내 아내는 딸처럼 대해주고 있네.”
  사실 며느리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 말에 아로픈 공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자네와 친하다는 건가? 귀족은 아닐 거고. 잘됐군. 폐하! 데르나 공작의 말로 본다면 데르나 공작과 엄청난 친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건은 걱정 안 해도 될 듯합니다.”
  ‘그 건’이라는 것은 에이라나가 아툰 제국의 귀족이 될지 말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툰 황제... 하지만 아르카아 공작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오란 공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는가?”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저희 집에 불청객이 한 명 있습니다.”
  그 말에 아툰 황제가 물었다.
  “불청객이라니?”
  “레니스 오르 폰트레스 공작...”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대륙 최강의 마검사라 불리는 불꽃의 레니스. 그의 힘은 그랜드소드마스터와 필적한다고 들었다. 그런 그가 왜 데르나 공작의 집에 머물고 있는가? 불안해졌다.
  “그가 왜 데르나 공작의 집에 있는가?”
  아툰 황제의 말에 한숨을 푹 쉰 아르카아 공작이 말했다.
  “어릴 적 소꿉친구라는군요.”
  그 말에 모두가 굳었다.
  그렇다면 에이라나가 크라잉 쪽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크흠... 회의... 계속 진행하지.”
  귀족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고로 ‘그랜드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은 굴러들어온 호박을 뻥 차기 싫었다.
  * * *
  4강전을 끝낸 에이라나가 휘안을 데리고 빠른 속도로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내려줘! 크게 다치지도 않았잖아?”
  그 말에 멈칫한 에이라나가 휘안을 내려주며 말했다.
  “미안, 주저앉아 있기에...”
  “그냥 어이가 없어서 주저앉아 있었다.”
  그 말에 피식 웃은 에이라나가 말했다.
  “일단... 조용한 장소로 가자.”
  휘안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둘은 경공술로 사라졌다. 현경급의 인물들이기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그런 그들을 얼굴을 찡그리며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캭! 저거 뭐야? 완전 괴물 아냐? 저건 어디서 배웠다냐? 크윽, 일단 쫓아가야지.”
  레니스도 경공술을 할 줄 안다. 에이라나에게 화보를 배웠으니 말이다. 레니스도 땅을 박찬 다음 두 사람을 따라갔다.
  아무도 없는 인적이 드문 숲. 그곳에 도착한 에이라나와 휘안이 멈춰 섰다.
  에이라나가 휘안을 보며 말했다.
  “하아... 다시 묻는다. 여긴 어떻게 왔지?”
  휘안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호수에 빠졌는데 뭔가가 번쩍했어. 눈을 뜨니 어느 숲이었는데 본 적도 없는 나무들이 빼곡하게 있었고... 완전 다른 곳이었다.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다.”
  그 말에 에이라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네가 빠진 호수 이름이 뭔데?”
  “몰라.”
  그 말에 잠시 어이가 없던 에이라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왜 빠졌는데?”
  그에 대한 휘안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더워서.”
  퍽!
  “에라, 미친놈아! 겨우 더워서 차원이동을 하냐? 이거 병신 아냐?”
  오랜만에 걸쭉하게 터지는 에이라나의 독설. 에이라나의 손에 뒤통수를 가격당한 휘안이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캭! 왜 때려? 그리고! 그 차원이동이 뭐냐니깐? 중원엔 어떻게 다시 돌아가? 이 이상한 목걸이 덕에 알아들을 수 있지만... 말도 할 수 없고 색목인만 가득하고... 그리고! 너 어떻게 살아 있어? 죽었다고 중원 무림에 소문이 쫙 퍼졌어. 무연이 널 죽게 만든 장로들 죽인다고 해서 마교에 피바람이 불었다고 소문까지 났다! 그리고 왜 여자가 되어 있냐?”
  머리를 벅벅 긁은 에이라나는 곧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일단 뒤의 질문에 답해주지. 알다시피 난 죽었다.”
  그 말에 얼굴을 찡그리는 휘안.
  “어떻게 살아 있어? 그것도 여자가 되어서. 혹시 음양전환공이라도 익혔냐? 머리랑 눈동자색은 또 왜 그래?”
  “환생이다.”
  휘안이 잠시 멈칫하더니 에이라나를 보며 물었다.
  “뭐... 라고?”
  “환생했다고. 벌써 500년이 지났다.”
  그 말에 놀란 휘안은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그리고... 아까 말했다시피 이 세계에 중원 무림은 없다.”
  그 말에 휘안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중원과 이곳은 다른 세계... 내가 이 세계에서 500년을 살았지만 중원 무림이란 곳이 있다는 건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 말에 더없이 멍해지는 휘안이었다.
  “넌 철저하게 이방인이다.”
  그 말은 휘안에게 있어 더 없는 충격이었다. 충격이 컸는지 그는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에이라나였다. 휘안도 바보는 아니니까...
  잠시 후 휘안이 물었다.
  “그러니까... 이 세계와 중원이 있는 세계는 다른 세계라고? 이 세계에는 중원 무림이라는 곳이 없고, 넌 그때 죽어 이곳에서 환생해서 500년을 살았다고?”
  “그래.”
  그 말에 휘안이 소리쳤다.
  “거짓말!”
  에이라나는 덤덤할 뿐이었다.
  “아무리 환골탈태를 했다고 해도 수명은 300년이 한계다! 여기가 아무리 마나의 농도가 짙다 해도... 나, 나도 환골탈태를 했어! 현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하지만 500년을 살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보통 현경에 오른 인간의 수명은 200살 정도 늘어난다. 그리고 환골탈태를 하면 300년. 하지만 환골탈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휘안이야 차원이동의 충격과 함께 갑작스럽게 늘어난 기의 농도에 의해 환골탈태를 했지만... 휘안에게 있어 에이라나의 말은 모두 거짓 같았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피식 웃을 뿐이다.
  “당연하지. 난 인간이 아니거든?”
  “뭐라고?”
  에이라나의 말에 멈칫하는 휘안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난 어릴 때부터 분명 천마심법을 운용하며 내공을 모았다. 그런데 왜 난 마기가 아닌 빙기를 사용하는 걸까?”
  내공을 완전히 말살시켰다 다시 모았다면 모를까 내공의 성향을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완전 멈칫한 휘안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다시 소개하지. 난 이제 하유현이 아냐. 하유현은 죽었다. 다시 환생한 내 이름은 에이라나다.
  “에...이라나?”
  멍하니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휘안을 보며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난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드래곤 일족의 성룡 에이라나!”
  그 말에 휘안은 더없이 멍해졌다. 도대체... 자신은 도대체 어디에 떨어졌단 말인가?
  * * *
  에이라나는 팔짱을 낀 채로 휘안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시간을 주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휘안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정말... 다른 세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라나.
  “응.”
  “그럼... 돌아갈 가능성이 없단 말인가?”
  휘안이 절망하며 물었다. 그런 휘안을 잠시 쳐다보던 에이라나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라 방법을 모르는 거다.”
  “뭐?”
  에이라나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난 환생해서 리샨 대륙에 왔다. 넌 차원 이동을 해서 몸도 왔다. 즉!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단 소리다!”
  그 말에 얼굴이 환해지는 휘안이었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지.”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지는 휘안의 반응을 보며 피식 웃은 에이라나가 말했다.
  “뭐... 안 되면 이 세계의 신에게 물어보면 되고.”
  “신?”
  에이라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휘안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 에이라나가 말했다.
  “넌 어떻게 기본적인 걸 모르냐?”
  그 말에 휘안이 말했다.
  “흥! 내가 온 건 겨우 몇 달밖에 되지 않았어.”
  그러다가 문득 에이라나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때 이상한 기운을 느꼈었는데...’
  막 데르나 공작령에 들어왔을 때 짜증을 느낀 에이라나다. 에이라나는 정파를 싫어했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짜증이 났을지도 몰랐다.
  “너 북쪽에서 계속 이쪽으로 내려왔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휘안.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더군.”
  “그들?”
  “나에게 이 목걸이를 준 사람들이야.”
  그 말에 에이라나가 목걸이를 보며 말했다.
  “통역 마법 아이템이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휘안이 말했다.
  “그런데...”
  “응?”
  “드래곤이 뭐야?”
  기본적 지식이 전혀 없는 휘안의 말에 에이라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갑자기 말했다.
  “레니스, 나와.”
  그 말에도 휘안은 별로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주시하는 시선을.
  에이라나의 말에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적발에 적안을 가진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런 사내를 보며 휘안이 물었다.
  “뭐야? 이 녀석?”
  “이 자식! 너 도대체 뭐야?”
  레니스는 휘안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말은 할 수 없기에 휘안은 얼굴만 찌푸릴 뿐이었다. 그런 휘안을 무시하며 레니스가 말했다.
  “에이라나,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해?”
  물론 통역마법을 쓰면 다 알아들을 수 있다. 레니스는 드래곤이다. 아무리 성룡이라고 하나 그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까딱 에이라나에게 걸릴 수 있었다. 물론 에이라나는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에이라나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다.”
  그 말에 얼굴을 찡그리는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이미 우리 정체를 알고 있기도 해.”
  그 말에 레니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드래곤인 걸 안다고?”
  일단 에이라나는 남궁휘안을 중원으로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이방인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돌려보내야 한다. 그러려면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또 드래곤들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어야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라나를 보며 레니스가 말했다.
  “설마... 인간이?”
  그런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를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는 너와 붙어도 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깐.”
  그 말에 레니스가 슬쩍 휘안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안다. 저자의 마나는 결코 유사인종의 그것을 뛰어 넘었다. 거의 성룡급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에이라나와 같은 검술을 사용한다면 절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레니스가 슬쩍 얼굴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드래곤들은 오만하다. 하지만 존중해줄 상대에게는 어느 정도 존중해준다. 우월의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모두를 깔보는 것은 아니다.
  레니스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난 레드 일족의 레니스다.”
  그런 레니스의 손을 쳐다보던 휘안이 손을 내밀며 간단하게 말했다.
  “남궁휘안.”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도 에이라나는 어떻게 하면 휘안을 무림으로 돌려보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 * *
  귀족들의 회의가 끝이 났다.
  아르카아 공작은 마차를 타고 서둘러 자신의 저택으로 갔다. 지금쯤이면 키라이스트도 학교에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아르카아 공작이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레니스가 막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에이라나와 휘안은 그런 그를 배웅해주고 있었다.
  아르카아 공작은 알 수 있었다. 레니스가 크라잉 왕국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르카아 공작은 소드마스터 상급이다.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오감이 뛰어났다. 그들의 말을 못 들을 리 없었다.
  “그냥 우리나라에 가지?”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은 불안해졌다. 하지만 다음에 들리는 에이라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난 이곳에 있을게.”
  그 말에 레니스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할 수 없고.”
  그렇게 말한 레니스가 마차에 올라 그대로 떠나버렸다. 참 쿨하게 떠났다. 그렇게 에이라나와 휘안도 들어가려고 할 때, 에이라나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아, 오셨어요?”
  에이라나가 아르카아 공작의 기운을 느끼며 말했다.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휘안도 고개를 숙였다. 들을 수만 있을 뿐,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들은 아르카아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휘안이 대륙에 있을 때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에이라나는 간단한 보상을 해주었다.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값어치였지만 말이다. 무려 50골드나 준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르카아 공작의 주머니에서 나왔지만...
  하지만 휘안의 동료들은 그것보다는 휘안과 더 같이 다니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들에게 휘안은 빙긋 웃으며 뭐라고 말했고 에이라나는 그것을 그들에게 통역해주었다.
  ‘다시 만나요.’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그들은 싱긋 웃으며 헤어졌다. 그들은 실력있는 용병이었다. 모두 다섯이었는데 그중 둘이나 금패였다. 나머지는 다 은패였다. 검사 셋, 마법사 하나, 정령사 하나로 된 파티였는데 검사 한 명이 소드마스터급이었고 마법사도 6클래스 마스터였다.
  그들은 휘안의 말을 듣고 헤어졌다. 휘안도 정이 들었는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무술대회는 끝나지 않았다.
  에이라나는 무술대회 결승 진출자였다. 그렇기에 귀찮음을 물리치고 결승전에 올라섰다. 그녀는 가면을 쓴 상태였다. 레니스도 이 경기만 보고 바로 돌아갈 것이라 했다. 에이라나는 귀찮은 발걸음으로 경기장에 올라섰다.
  엄청난 환성이 들려왔다. 에이라나는 그것도 귀찮았다. 상대는 소드마스터 초급의 경지의 젊은 기사였다. 하지만 에이라나에게 있어 너무도 가벼운 상대일 뿐이었다.
  그가 에이라나를 보며 말했다.
  “그랜드소드마스터와 겨룰 수 있어 영광이오.”
  영광이기는 했다.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영광으로 아세요.”
  나른한 말투에 그가 당황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자신만큼의 실력자 즉 휘안이었다. 결국은 휘안을 찾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대회에 관심이 없었다. 기사는 처음부터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켰지만, 에이라나는 검조차 뽑지 않고 있었다.
  기사는 조심스럽게 에이라나에게 돌진하며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에이라나가 발검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언제 발검했냐는 듯 에이라나의 롱소드는 검집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기사의 미스릴 검은 완전 박살이 나버렸다.
  기사는 멍해졌다. 사람들도 일순간 멍해졌다. 그들은 그랜드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하고 말았다. 소드마스터를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모든 그랜드소드마스터들이 이런 것은 아니었다. 에이라나는 무림 마교의 무공을 익혔다. 대륙의 검술과는 엄청 비교되었다. 그만큼 검술의 수준이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사실상 무림의 무공이 대단했다.
  * * *
  대륙이 진동했다.
  그랜드소드마스터 둘의 출현! 갑작스러운 실력자들의 출현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둘이 성인이 갓 된 듯한 어린 외모라는 것과 둘 다 아툰 제국의 무술 대회에 참가해 현재 아툰 제국의 공작가 데르나 공작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소왕국 하나는 날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들의 등장으로 모든 나라의 이목이 아툰 제국에 집중되고 있었다.
  특히 데프론 제국은 아툰 제국의 그랜드소드마스터들의 등장에 더욱 신경 쓰는 그들이었다.
  데르나 공작가의 키라이스트를 암살하려던 그들. 하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보냈던 기사들이 모두 전멸해버렸다. 그들은 그 일을 저지른 자가 바로 이번에 나타난 그랜드소드마스터 중 한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 짐작이 맞긴 하지만 말이다.
  밖에서는 이런 저런 소리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에이라나와 남궁휘안은 천하태평이었다. 그들은 데르나 공작가 안에서 그저 놀고먹을 뿐이었다. 그랜드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이 왠지 아깝게 느껴졌다.
  “누나, 나 왔어.”
  키라이스트가 정원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있는 에이라나를 보며 말했다.
  키라이스트는 황립 국립 학교 아투아루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곳은 돈이 있는 평민이나 뭔가에 재능이 있는 평민들도 들어가는 곳이었다. 귀족들도 들어가지만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마디로 엘리트 집단.
  “형은?”
  그런 엘리트 집단의 키라이스트도 요즘 에이라나나 휘안 때문에 큰 소리 한 번 못치고 있었다. 키라이스트가 휘안을 찾자 에이라나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의아해하며 위를 쳐다보는 키라이스트.
  “형, 지금 뭐해?”
  키라이스트는 어이가 없었다. 휘안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서 멍하니 있었다. 키라이스트의 물음에 휘안이 말했다.
  “있어, 그냥, 좀, 생각하고 있어.”
  아직 대륙어가 서툰 휘안이었다. 에이라나가 간단하게 대화할 수 있게 마법으로 언어를 심어주었다. 8서클 마법이니 에이라나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툴게나마 기억 전의 마법을 사용하면 용언까지 그대로 각인될 수 있었다. 숙련도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이라도 완벽한 건 아니었다.
  용언은 하나의 권능이다. 마구 남발하면 안 된다. 그렇기에 아직 이런 대화밖에 안 된다. 뭐 대화는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글도 읽을 수 있고, 아티팩트도 필요 없었다. 대충 책도 읽을 수 있으니 충분했다.
  언어를 심어준 지 5일이 지났다. 한 일주일이면 완벽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 주입 스크롤도 사용하면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모든 언어가 정리되지만 말이다.
  그런 휘안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물었다.
  “피 안 쏠려?”
  “쏠려.”
  지금 뭘 하자는 건지, 한숨을 푹 쉰 에이라나가 말했다.
  “네가 뭔 생각을 한다고... 그냥 내려와.”
  그 말에 휘안이 내려왔다. 휘안도 24살이다. 하유현, 즉 에이라나가 죽기 전 그녀와 동갑이었다는 뜻이다. 밑으로 내려온 휘안의 손에는 청옥패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키라이스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손에 들린 거 뭐야?”
  그 말에 멈칫한 휘안.
  에이라나도 휘안의 손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남궁세가 소가주의 패군.”
  그 말에 의아해 하는 키라이스트.
  “남궁...세가?”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녀석 저래 보여도 명문 가문이거든?”
  그 말에 휘안이 물었다.
  “귀족?”
  그 말에 에이라나가 피식 웃었다.
  “글쎄... 리샨 대륙에서는 귀족이라고 보면 되겠군. 아무튼 검으로는 알아주는 가문이지. 그러고 보니 남궁가주의 실력도 상당하지?”
  그 말에 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화경의 끝자락을 보고 계셔. 이곳 기준으로 따지면 소드마스터 최상급?”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입을 쩍 벌렸다.
  “정말? 그런데 왜 안 유명하지?”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녀석이나 나는 이 대륙 사람이 아니거든?”
  “에?”
  휘안이 덧붙였다.
  “우린 중원 사람이야.”
  에이라나는 리샨 대륙 사람이다. 하지만 뭐, 유희 중이니 그런 건 따질 필요가 없었다.
  키라이스트가 당황하며 물었다.
  “주, 중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휘안과 에이라나.
  “그곳이 어디야?”
  키라이스트의 물음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리샨 대륙이 아냐. 아주 먼 곳이지. 우연치 않게 마법에 의해 넘어왔어. 뭐 그곳에는 마법이 없지만.”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다른 대륙이 있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휘안과 에이라나.
  키라이스트는 당황했다. 자신은 태어나서 다른 대륙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키라이스트가 물었다.
  “그럼 누나는 거기서 어떤 신분이었는데?”
  그 말에 휘안이 말했다.
  “마교의 소교주.”
  “마, 마교?”
  그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꿈에서도 마교라고.’
  키라이스트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물었다.
  “어떤 곳이야?”
  그 말에 에이라나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교. 중원 무림에서 최강의 문파야. 그 어떤 친분도 없이 정파와 사파를 동시에 상대해 이긴 적도 여러 번 있어.”
  에이라나는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휘안은 달랐다.
  “정말 사악한 것들만 모여 있지. 쓰는 무공에서 마기가 풀풀 풍겨. 악귀들이 따로 없다니깐? 걸핏하면 중원 무림 통일이랍시고 정파로 쳐들어와서 깽판치고. 그것 때문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그 말에 에이라나가 인상을 팍 썼다.
  “천마교는 힘을 숭배하는 곳! 너희처럼 덜떨어진 정파, 구파 일방과 오대세가와는 차원이 달라!”
  “어디서 덜떨어졌다는 거야?”
  “흥! 매일 지들 배만 채우려고 싸우는 게 멍청하고 덜떨어진 거지! 혼자서 우리 마교도 상대 못해 매일 으르렁거리는 사파와 손잡고 막으면서 뭐가 그리 잘났는지.”
  “너 말 다했냐?”
  “아니? 못했거든?”
  두 사람이 으르렁거렸다. 그렇다고 칼부림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저렇게 보여도 중원에 있을 때도 친분을 유지했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배경을 보고 사귄 것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사귀었다. 물론 이렇게 말싸움하면 항상 지는 쪽은 휘안이었다. 일단 말빨로 에이라나에게 안 되는 것은 물론이요, 가끔씩...
  ‘덜떨어진 거 맞잖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죄 없는 사파 문파 하나를 족쳤다며? 사도황(사도황은 무림맹과 다르게 사파의 중심지다)에서 난리 났었지?’
  가끔씩 이렇게 가슴을 찌르는 무연의 말에 휘안은 늘 말싸움에서 졌다. 자신도 무림맹이 하는 일이 전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고 말이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키라이스트가 당황했다.
  “어쭈? 한판 붙어볼래?”
  “누가 못할 줄 아냐?”
  왠지 모든 대륙 기사들의 선망의 대상인 그랜드소드마스터 경지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 같은 두 사람, 모든 무림인들의 꿈이며 선망의 경지인 현경의 경지에 먹칠하는 것 같은 두 사람...
  그랜드소드마스터와 현경, 두 칭호가 울고 있었다. 지금 저 두 사람에 의해서... 왠지 현경과 그랜드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유치하게 노는 두 사람이었다.
    학교
  에이라나는 따분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한가하지 않았다. 바로 속에서 엄청나게 항의해대는 두 존재 때문이었다.
  -우씨~ 놀아줘~ 주인!
  -심심하다.
  요즘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두 검이 에이라나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에이라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끄러워.”
  하지만...
  -아악~ 놀아줘~ 놀아줘~ 놀아달란 말야! 심심해.
  -시끄럽긴 하지만 나도 심심하다.
  에이라나의 말에 은아는 더욱 소리를 질러댔고, 흑아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의 머릿속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두 존재, 흑아와 은아.
  그냥 무시하고 그들과의 의식을 닫아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랬다가는 뒷감당이 쉽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쉰 에이라나가 말했다.
  “닥쳐라, 씨발 것들아.”
  그 말에 곧바로 입을 다무는 두 존재. 다시 말하지만 에이라나는 성질이 더럽다. 보통 더러운 게 아니라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전생에 에이라나가 하유현이라는 이름으로 중원 무림을 돌아다닐 때 중소문파 하나가 유현에게 알짱거렸다.
  중소문파라 하나 문도수가 200명이나 되는 꽤 큰 문파였다. 그 문파가 하루 만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풍비박산도 아닌 완전 초토화되었다. 전각이란 전각은 모조리 불에 탔고,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땅에 묻혀버렸다. 그렇게 그 문파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이 폐허로 변해버렸다. 그것도 단 하루만에.
  물론 그때 그 중소문파가 한 짓거리는 정파라는 이름을 내걸고 완전 사파짓을 하는 쓰레기들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평판이 좋지 않던 곳이었다.
  그것을 지워버린 것은 유현의 직속 호위부대인 소마대였다. 교주의 직속 호위 부대가 천마대라면 소교주의 직속 호위 부대는 바로 소마대였다.
  소마대 부대원들은 모두 30명. 그중 10명이 유현에게 따라붙었었다. 유현까지 포함해 모두 11명. 아무리 삼류들이 모였다고 하나 200명을 처리했다는 것은 마교의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려주는 예였다. 중소문파 하나를 지워버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에이라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아가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주인이... 주인이 나보고 입 닥치래!
  -...
  에이라나는 골이 다 지끈거렸다.
  흑아는 아무 말 없었지만 에이라나는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숨을 푹 쉰 에이라나가 말했다.
  “정 그러면 알아서들 돌아다녀.”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흑아와 은아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고.
  솨아아아.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공중에서 아주 귀엽게 생긴 은발의 다섯 살짜리 어린애와 흑발의 잘생긴 미남자가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들의 본체를 쥐었다. 흑아는 자신의 본체를 허리에 찼고, 은아는 본체가 몸속으로 스르륵 흡수되었다.
  그것이 놀라울 만도 하지만 에이라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은아가 생글거리며 흑아에게 붙었다.
  “흑아~ 우리 놀러가자!”
  흑아의 목을 잡고 생글생글 웃는 은아. 그런 은아를 보며 피식 웃은 흑아가 에이라나에게 말했다.
  “그냥 한번 쭉 돌아보고 오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한 에이라나에게 은아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녀올게~ 주인.”
  사라지는 두 존재를 보며 에이라나가 편안한 듯 말했다.
  “아~ 드디어 시끄러운 것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바로 잠을 자버리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는 방 안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사실 어젯밤부터 심심함과 지루함이 터져버렸는지 계속 에이라나를 자지 못하게 방해했던 흑아와 은아였다.
  꿈틀.
  에이라나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뭐야?”
  에이라나가 슬쩍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흑아와 은아는 새벽시장 구경 간다고 새벽에 나갔다. 에이라나가 잠이 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더 이상 잘 수가 없었다. 바로 휘안이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남의 방에 침입해?”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말했다.
  “놀러가자!”
  슬쩍 얼굴을 찌푸린 에이라나가 다시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너 혼자 가라.”
  “왜?”
  “귀찮아.”
  그 말에 슬쩍 얼굴을 찌푸린 휘안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난 오늘 키라이스트 녀석이 다닌다는 학교에 가 볼 거야.”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휘안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거긴 왜?”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말했다.
  “그냥, 그 학교 있는 애들... 어떻게 보면 이곳의 후기지수들이잖아? 한번 보려고.”
  “흥! 콧대만 높은 것들이 잔뜩 모여 있겠지.”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말했다.
  “그래도 가볼래.”
  그 말에 에이라나가 빤히 휘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갈래.”
  그 말에 생긋 웃은 휘안이 말했다.
  “귀찮다며?”
  “나도 어떤지 궁금해.”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휘안을 보며 말했다.
  “나가.”
  “응?”
  “뭐, 나가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잠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헉! 나, 나가! 기다려!”
  기겁하며 나가는 휘안을 보며 히죽 웃은 에이라나가 말했다.
  “쯧, 숙맥.”
  휘안이 이상하다기보다 에이라나가 특이한 것이었다.
  키라이스트가 마차에 올라타려고 하고 있었다.
  “여~ 키라이스트.”
  이제 말을 능숙하게 하는 휘안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응? 형.”
  키라이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긴 왜 왔어?”
  의아한 듯 질문하는 키라이스트. 그런 키라이스트에게 히죽 웃어준 휘안이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아니, 나도 따라 가보게.”
  “엥?”
  갑작스러운 휘안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키라이스트.
  “학교에 가보게.”
  “거긴 왜?”
  “궁금해서.”
  당연하다는 듯한 휘안의 말에 멍하던 키라이스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수업 직접 듣는 건 아니니깐.”
  그렇게 중얼거린 키라이스트가 마차에 탔다.
  “출발.”
  마차에 탄 키라이스트가 마부에게 말하자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휘안은 편안한 자세로 마차에 앉아 있었다. 키라이스트도 책을 펴서 대충 훑어보고 있었다. 휘안이 잠시 천장을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키라이스트는 몰랐다. 마차 천장에 누가 있는지. 하지만 휘안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가 마차 천장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다는 것은 휘안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휘안과 키라이스트. 그리고 덤(?)으로 마차 천장에 누운 에이라나가 탄 마차가 아툰 제국 황립 국립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많은 학생들이 등교 중이었다. 그들은 데르나 공작가의 마차임을 알아보고 잠시 멈칫했다. 마차에서 키라이스트가 내리자 한 번씩 인사를 했다. 하지만,
  “화려하네?”
  마차에서 내리는 인물을 보고 모두가 굳었다. 흑발에 흑안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였다. 나이는 십대 후반? 하지만 외모와는 다르게 훨씬 나이가 많은 그는 바로 남궁휘안이었다.
  휘안은 주위를 휙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휘안을 보며 멍하니 있던 아카데미 학생들이 중얼거렸다.
  “흐, 흑안의 검사?”
  “흑안의 검사다!”
  웅성! 웅성! 웅성!
  장내는 바로 소란스러워졌다. 키라이스트에게 인사하려고 다가오던 루리아, 루이스, 아레인, 에르인도 굳었다. 그들은 대회가 끝난 후 에이라나와 휘안을 만나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갈 때마다 휘안과 에이라나는 집에 없었다.
  그 이유가 바로 매일매일 찾아오는 귀족들 때문에 귀찮음이 극에 달한 휘안과 에이라나가 공작가 저택 지붕에서 생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명상을 하거나 훈련은 했지만 말이다. 에이라나도 본격적으로 다시 훈련에 돌입했다. 에이라나는 검으로는 이 대륙에 상대할 자가 없었다. 한 마디로 경쟁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많이 나른해져 있었다. 하지만 휘안이 나타났다. 그것이 에이라나에게 활력소가 되었다.
  처음에는 귀족들을 피하기 위해 지붕으로 갔지만 슬슬 명상과 훈련에 박차를 가하며 아예 근처 숲에 들어가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흑안의 검사와 은빛 가면의 여검사는 비밀리에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 둘 중 하나가 지금 키라이스트와 나타났다. 굳는 것은 당연했다.
  휘안은 웅성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마차를 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누워있을 거야?”
  휘안의 말에 마차 위에서 인영 하나가 꿈틀댔다. 그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키라이스트. 인영 하나가 마차 천장에서 내려왔다. 은발에 은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바로 에이라나였다.
  “돈을 처발랐구만.”
  에이라나가 아카데미를 보자마자 꺼낸 첫 마디였다.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말했다.
  “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응.”
  그 모습을 보면서도 에이라나와 휘안은 태연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각각 정파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소가주에 마교의 소교주였단 사람들이다. 화려한 건물은 수도 없이 보았다. 특히 무림맹과 마교의 전각들은 너무 화려했다. 그렇기에 칭찬을 할지언정 감탄은 하지 않았다. 물론 에이라나의 말은 칭찬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은빛 가면의 여검사의 등장에 모두가 또다시 경악했다. 키라이스트도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키라이스트의 물음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마차 타고.”
  그 말에도 키라이스트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무시하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여~.”
  에이라나가 루리아, 루이스, 아레인, 에르인을 보며 손을 흔들자 그들도 어색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학교에는 왜 왔어요?”
  루리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묻자 에이라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할 짓 없어서.”
  그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는 루이스. 그런 루이스를 힐끔 쳐다본 에이라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구경났냐? 뭘 그리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봐?”
  에이라나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던 모두가 ‘핫!’하는 표정으로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해도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엄청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에이라나와 휘안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등교 시간이 계속되고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띵!동!댕!동!
  “허걱!”
  “뭐, 뭐야?”
  “벌써 종쳐?”
  “끄악! 늦었다!”
  한동안 웅성거리며 에이라나와 휘안들을 쳐다보던 애들이 화들짝 놀라며 우르르 아카데미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키라이스트도 화들짝 놀라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늦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휘안이 중얼거렸다.
  “여기서도 시간을 칼 같이 지켜야 하는구나.”
  “그러게 말이다.”
  그런 애들을 보며 에이라나와 휘안이 중얼거렸다.
  힐끔! 힐끔!
  아툰 제국 황립 국립 아카데미는 모두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로 나뉘는데 모두 1~5반까지 있었다.
  고등부 1반.
  모든 학생들이 지금 교실 뒤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언제 들고 왔는지 에이라나와 휘안이 당당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첫 번째는 수리 시간이라지?”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말했다.
  “수리? 이 대륙의 수리랑 중원의 수리는 같아?”
  “기본적인 것은 같아. 너도 알다시피 이 대륙에는 마법이란 게 있거든. 그래서 중원보다 더 발전해 있지. 뭐 기본적인 틀은 크게 다르지 않아.”
  에이라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휘안. 그렇게 노닥거리는 두 사람을 맨 뒤쪽에 앉은 키라이스트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누나, 오늘 계속 학교에 있을 거야?”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답했다.
  “보고.”
  한숨을 푹 쉰 키라이스트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옆에 있는 아레인이 속삭였다.
  “저 인간이 왜 학교에 왔냐?”
  아레인의 말에 키라이스트도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와보고 싶었겠지.”
  그런 두 사람을 스윽 본 에이라나가 교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커다란 책장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시선이 책장을 훑더니 맨 위에 누구의 손때도 타지 않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책장은 꽤 컸다. 에이라나도 키가 꽤 큰데 그런 그녀가 까치발을 세울 만큼 책장이 컸다.
  그 책을 힐끔 쳐다본 에이라나가 눈을 빛냈다. 책은 새 책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고 있었기에 먼지가 많았다. 자리로 돌아온 에이라나가 그것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 그것을 보고 휘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휘안이 물었다.
  “제목 뭐야?”
  “대륙 참모들이 한 유명한 말.”
  “제목이 뭐 그래?”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에이라나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휘안도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문득 책 한 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뽑아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과연 어떤 책을 뽑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수리 선생이 들어오자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수리 선생은 교실로 들어오다가 뒤쪽에 앉아서 책을 읽는 두 사람을 보며 땀을 삐질 흘렸다. 수리 선생은 50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는데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뒤쪽으로 가더니 질문했다.
  “저...”
  그런 수리 선생의 말에 에이라나와 휘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명성은 어마어마했다.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엄청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후작의 작위도 따낼 수 있는 두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자신을 보자 흠칫하는 수리 선생 일라로 자작.
  그런 일라로 자작을 보며 휘안이 미안한 듯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학교를 구경하러 왔는데, 수업에 방해가 된다면 나가겠습니다.”
  휘안이 예의바르게 나오자 일라로 자작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얼마나 콧대가 높은지. 특히 그 경지가 높아질수록 콧대는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리샨 대륙에서 검의 끝이라 불리는 그랜드소드마스터라는 경지에 이른 휘안은 오만하기 그지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렇게 예의바른 청년일 줄 몰랐기에 조금 당황했다. 그것도 잠시 급히 휘안을 말렸다.
  “아, 아닙니다. 그냥 편안하게 교실에서 있으십시오. 수리라는 과목이 조금 지루한 면이 있는지라...”
  보통 때 같으면 학생들에게 절대 하지 않는 소리를 하는 일라로 자작. 그런 자작을 보며 휘안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런 휘안을 보며 자작도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학생들은 말똥말똥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일라로 자작은 휘안에게 어색하게 웃어준 다음 뒤돌아섰다. 일라로 자작의 얼굴에는 어느새 어색함이 가시고 보통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업하자.”
  그러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선생님이 수리 과목은 지루하다면서요!”
  “맞아요! 머리 아파요!”
  “그냥 자습하지요?”
  “아니, 차라리 흑안의 검사님이나 은빛 가면의 검사님께 검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게 좋지 않을까요?”
  “와! 그거 좋다.”
  학생들의 불만의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는 일라로 자작. 상황이 이렇게까지 번지자 수습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라로 자작을 도와주는 이가 있었으니...
  “시끄러우니 닥치고 수업이나 하시지들?”
  에이라나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 말에 조용해지는 교실. 조용하다 못해 썰렁해졌다. 그런 에이라나의 발언에 모두가 합죽이가 되었다.
  “수업하시죠.”
  “예? 아, 예.”
  에이라나의 발언에 멍해졌던 일라로 자작은 어색하게 웃은 다음 수업을 시작했다. 교실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 * *
  1교시가 끝났다.
  수업 전 에이라나의 발언에 의해 모두가 조용하게 수리 수업을 들었다. 이렇게 조용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일라로 자작이 감탄할 정도였다.
  에이라나도 수업 한 시간 만에 드래곤답게 책을 모두 읽었다. 꽤 두꺼운 책이었지만 에이라나는 드래곤이다. 한 번 읽은 건 완벽하게 기억하고 이해력도 빨랐다. 책 한 번 읽고 중요한 정보만 머릿속에 기억시키는 건 에이라나에게 간단했다.
  에이라나는 책을 덮었다. 하지만 에이라나의 얼굴에는 책을 읽기 전의 가벼움이 없었다.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정리하고 있는 키라이스트에게 다가갔다.
  키라이스트가 멈칫하며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에이라나가 키라이스트의 녹안을 주시하며 물었다.
  “야, 너 카프라스라는 인간 아냐?”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카프라스?”
  그렇게 키라이스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루이스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오르칼 왕국의 백작 카프라스 크논 백작!”
  루이스의 말에 키라이스트도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크논 백작?”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 자에 대해서 아는 것 다 불어봐. 자잘한 것도!”
  그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은 루이스가 말했다.
  “에... 그 사람은 말이죠. 일단 엄청난 천재입니다. 나이는 30대 중반이죠.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고 7서클 마법사인데, 그것보다는 엄청난 지략가로 유명하죠. 오르칼 왕국의 자작가에서 태어났지만, 머리가 좋아 집안을 백작으로 만든 유명한 인물이죠.”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그건 왜...”
  “아, 아무것도 아냐.”
  에이라나의 얼굴은 조금 풀어져 있었다. 에이라나가 자신이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책을 보며 중얼거렸다.
  “‘힘이 있으면 뭐하는가?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인가?’라고?”
  에이라나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다시 책장에 꼽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에이라나가 피식 웃었다.
  2교시는 마법 수업이었다.
  반에는 기사 지망생이 많이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마법 수업을 빼먹을 수는 없었다.
  에이라나와 휘안도 학교 마법 실습장으로 이동했다. 마법 실습장은 커다란 강당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방어 마법이 걸려 있으며 마법 서적도 많았다. 이동하는 동안 에이라나와 휘안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그것을 싸악 무시했고 휘안은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루이스가 물었다.
  “저... 무슨 책 읽고 있어요?”
  루이스의 물음에 휘안이 말했다.
  “기초 마법서.”
  “에?”
  휘안의 말에 루이스가 멈칫했다. 에이라나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은 왜 배워? 현재 리샨 대륙에서 드래곤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널 이길 수 없어.”
  그 말에 휘안이 말했다.
  “그래도, 호기심이 가는 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물건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것, 엄청난 거리를 한순간에 이동하는 것 등 놀라운 것들 투성이잖아?”
  “하긴... 편하기는 하지.”
  에이라나와 휘안의 대화를 들으며 키라이스트가 말했다.
  “누나, 형, 마법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누나, 형은 이미 그랜드소드마스터잖아? 배울 필요 있나? 없어도 강하잖아?”
  “난 배울 필요 없어.”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물었다.
  “어? 편한 거 배우면 좋잖아?”
  휘안의 말에 루이스가 말했다.
  “그게 아니죠, 마법이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고 에이라나가 말했다.
  “벌써 익혔으니깐.”
  그 말에 키라이스트와 루이스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그래? 놀라운 걸?”
  휘안의 말에 에이라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전음을 보냈다.
  [병신아, 너 내가 뭐로 보이냐?]
  에이라나의 갑작스러운 전음에 얼굴을 찌푸린 휘안도 전음을 날렸다.
  [네가 너지, 그럼 뭐냐?]
  그 말에 에이라나는 더더욱 한심한 표정으로 전음을 날렸다.
  [나 드래곤이다.]
  [알아.]
  [드래곤이 어떤 종족으로 보이냐?]
  그 말에 멈칫한 휘안이 다시 말했다.
  [음... 수명이 일 만이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종족?]
  [병신아, 그 강한 힘이 뭔 줄 아냐?]
  [...]
  에이라나가 혀를 차며 전음을 보냈다.
  [마법이다. 드래곤은 마법의 종족이야. 마나, 즉 기를 다루는 능력도 인간과는 비교도 안 돼. 드래곤 하트라는 마나를 저장하는 곳도 있어. 난 단전과 드래곤 하트에 각각 내공과 마나를 저장하고 있다.]
  그 말에 멈칫한 휘안이 질렸다는 듯 말했다.
  [그... 말은!]
  [내 내공량은 거의 네 2배라는 소리다.]
  [미친.]
  휘안의 내공은 전부 삼갑자 반이었다. 그래도 거의 사갑자에 근접해 있었다. 현경이라 해서 무조건 내공이 사갑자인 것은 아니었다. 에이라나의 어릴 적을 보면 그러했다.
  뭐, 휘안의 내공이 사갑자가 된다 하더라도 순수한 내공량으로만 따져도 에이라나가 훨씬 방대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현경 정도 되면 승부를 결정짓는 건 내공량이 아니지만 휘안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마법만으로 널 제압하는 것도 가능해.]
  [그만해라. 내가 약해 보인다.]
  [킥킥킥.]
  휘안은 항복했다. 에이라나가 검술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한다면 완전 괴물이 따로 없을 것이다.
  전음으로 실없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키라이스트가 물었다.
  “뭐, 뭐라고? 마법도 한다고?”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기본만.”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한 키라이스트와 루이스였다.
  “마...검사?”
  그런 루이스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기본만 할 줄 안다니깐?”
  드래곤에게 있어 기본이란 9서클 마법이다.
  에이라나와 휘안은 역시 마법 교실로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키라이스트와 루이스는 어안이 벙벙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법 수업은 수리 수업과 다를 바 없었다.
  마나를 계산하고 배치하는 것이 마법이다. 적어도 드래곤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에게는 그랬다. 물론 주체 못할 무지막지한 마나와 정신력이 있다면 다소 위력은 떨어지겠지만, 용언 마법처럼 의지를 일으켜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존재는 유사인종들 중 한 명도 없었다. 지금 에이라나 옆에 있는 휘안은 가능할 지도 몰랐다.
  열심히 실습을 하는 학생들... 그리고 뒤에서 나른하게 그것을 지켜보는 에이라나...
  그때였다.
  “파이어!”
  실습을 하는 과정에서 한 학생이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불꽃이 잘못 튀었다. 그것은 다른 곳도 아니고 에이라나와 휘안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앗!”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당황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침착하게 손을 살짝 휘둘렀다. 그러자 흩어지는 불꽃.
  “불장난도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거다.”
  아직 2서클 마법이지만 맨손으로 마법 불꽃을 쳐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순간 모두는 새삼스럽게 에이라나가 초월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런 저런 수업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에이라나가 슬쩍 얼굴을 찌푸리며 옆에서 식사하는 키라이스트에게 말했다.
  “따분하군.”
  그런 에이라나의 말에 키라이스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학교는 그런 곳인 걸?”
  키라이스트의 말에 에이라나가 투덜거렸다.
  “너무 따분해. 차라리 명상하는 게 더 낫겠다.”
  에이라나가 투덜거리자 기초 마법서를 독파한 휘안이 말했다.
  “흐응~ 마법은 편리한 거구나.”
  휘안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아니, 그렇다고... 나도 배워볼까?”
  멍하니 중얼거리는 휘안의 말에 나무 밑에서 식사하던 모두가 기겁했다.
  “형, 참아. 마법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배워 보지, 그래?”
  에이라나의 긍정적인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너는 대륙의 그 어떠한 존재보다 마나를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나 대륙의 기존 검사들과 다르게 단전에 내공을 모으고 있잖아? 마나는 넘쳐흐르고. 대충 이론만 알면 귀찮게 계산하지 않아도 충분히 정신력만으로 마법을 구현할 수 있어.”
  에이라나의 말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휘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까? 심장에 모을 필요 없겠지?”
  휘안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건 무공에 방해만 될 뿐이야.”
  에이라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휘안. 키라이스트, 루리아, 루이스, 아레인, 에르인은 둘의 말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멍하니 있는 다섯 사람을 느낀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건 내 생각일 뿐이지만... 아무튼,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일단 마법까지 배운다는 것이 알려지면 골치가 아파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에이라나였다.
  * * *
  오르칼 왕국 수도에 있는 한 왕국의 저택. 짙은 남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한 남자가 창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흐음... 데프론 제국이 전쟁 준비를?”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뒤에 부복해 있던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한참 전쟁 준비 중인 것으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대가리도 제대로 굴리지 못하는 것들이 전쟁을 일으켜서 뭐하나? 큭큭큭, 멍청한 것들. 자신들의 제국의 수명이 끝난 것도 모르고 전쟁을 일으키려 하다니.”
  부복해 있던 복면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데프론 제국이 무너지는 것이 맞습니까?”
  그 말에 남자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 데프론의 운은 다 했어. 커다란 두 개의 기운이 지금 데프론을 삼키려 하고 있다.”
  그 말에 복면인은 조금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 왕국까지 위험한 것은 아닌지.”
  그 말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위험 요소들은 죽여버리면 그만이야.”
  매우 오만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남자. 복면인도 눈앞의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아툰 제국에 그랜드소드마스터 둘이 나타났다고?”
  그 말에 복면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엄청난 실력자라고 합니다.”
  남자가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커다란 기운은 그 둘이군. 그렇다면 데프론 제국과 아툰 제국은 알아서 싸우며 공멸하겠지. 그때 오르칼 왕국이 나선다.
  남자의 말에 복면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에게 왕국을 제국으로 바꿔준다고 전해라.”
  그 말에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복면인이 뜸을 들이자 얼굴을 찌푸린 남자가 물었다.
  “뭐지?”
  “카프라스 백작님의 주군은 누구십니까?”
  그 말에 남자, 카프라스 백작이 멈칫했다.
  “그건 왜 묻지?”
  그 말에 복면인이 당황하며 말했다.
  “백작님께서는 그 누구도 주군으로 모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왕국의 귀족이라면 응당 왕을 주군으로 섬겨야...”
  복면인은 입을 다물었다. 카프라스 백작에게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폭사되었기 때문이었다.
  “내 주군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법사라고만 알려진 카프라스 백작. 오르칼 국왕만 아는 것이지만 그는 마검사다. 그것도 소드마스터 상급으로 추정되는 무시무시한 검사. 지략도 무시무시했다.
  카프라스 백작의 말에 복면인이 당황했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은 살기를 거두었다.
  “물러가라!”
  “예!”
  복면인이 사라졌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내 주군은... 없지?”
  카프라스 백작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 * *
  휘안은 빵을 먹고 에이라나는 아카데미 매점에서 산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키라이스트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라나가 우유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은아, 무슨 일이야?”
  그 말과 동시에 에이라나가 기대고 있던 나무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야옹.”
  엄청나게 귀여운 새끼 고양이였다. 루리아와 에르인은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키라이스트와 루이스와 아레인은 갑작스러운 은빛 고양이의 등장에 놀랐으며, 휘안은 고양이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몸을 굳혔다.
  에이라나는 어깨 위에 있는 고양이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고양이가 골골거렸다.
  [주인.]
  고양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라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흑아랑 놀러간다더니만?”
  [흑아랑 찢어졌어. 난 주인에게 왔고, 흑아는 아직 돌아다니고 있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이라나가 말했다.
  “너도 알아서 놀아라.”
  멈칫!
  에이라나의 손을 잡고 장난을 치던 은아가 굳었다. 에이라나가 환하게 웃었다.
  “감히 내 잠을 방해하고 놀러나간 주제에 벌써 기어들어와? 더 놀지 그러냐?”
  [주, 주인...]
  잠을 방해받은 것이 상당히 기분 나쁜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의 말에 고양이 모습의 은아가 흠칫했다. 그리고 에이라나의 말에 여자애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덥석!
  에이라나는 은아의 뒷덜미를 잡고 일어났다.
  “야옹~ 야옹~ 야~~~~~옹.”
  은아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가차 없었다.
  “새벽부터 남의 달콤한 밤을 방해한 놈에게는 이게 딱이지.”
  뒷덜미를 잡고 멀리 던져버리는 에이라나.
  그리고.
  “야~~~~~~~~~~~~~~~~~~~~옹.”
  은아의 울음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여자애들이 울먹였다.
  “고양이 죽으면 어떻게 해요.”
  “불쌍해.”
  그건 남자들도 별 다를 게 없었다.
  “악마.”
  “여자도 아냐.”
  “.....”
  “마교인 아니랄까 봐.”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저 정도로 다치지도 않아. 집에 가 보면 기어들어와 있겠지. 어제 잠잘 때부터 계속 방해질 하던 녀석이라고!”
  에이라나가 스산한 살기를 뿌리자 모두가 입 다물었다. 그래도 은아가 불쌍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4교시가 끝나고 점심을 먹는다. 고로 지금은 5교시였다. 7교시까지 수업하고 마치는 아툰 제국 황립 국립 아카데미. 고등부 1반은 지금 검술수업 시간이었다. 고로 지금 모두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고등부를 가르치는 것은 소드마스터급 기사였다.
  백작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모로콘 백장은 소드마스터 중급의 실력자였다. 모로콘 백작은 수업이 시작 되자 싱글벙글이었다. 학교에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키라이스트를 따라 그랜드소드마스터 둘이 학교에 왔다고.
  그렇기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그랜드소드마스터 둘을 만난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모로콘 백작이었다. 그는 뼛속까지 기사였다. 모로콘 백작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연무장에 나타났다.
  모로콘 백작이 맨 처음 본 것은 남학생들의 대부분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흑발에 흑안을 가진 청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청년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검술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우르르르 에이라나와 휘안에게 몰려들었다.
  에이라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에게 학생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휘안은 그러지 못했다.
  모로콘 백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만!”
  모로콘 백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휘안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던 모두가 움찔했다. 나른한 표정을 짓던 에이라나도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한 중년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중년인의 기운으로 보아 소드마스터 중급의 기사로 보였다.
  에이라나의 눈이 반짝였고 그건 휘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륙 사람치곤 제법이군.’
  ‘멋진 기세다.’
  둘 다 모로콘 백작을 보며 감탄했다.
  모로콘 백작이 휘안을 보며 말했다.
  “유명한 흑안의 검사를 만나서 영광이오.”
  모로콘 백작의 말에 휘안도 생긋 웃으며 포권 자세를 취했다.
  “저도 이렇게 기운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처음 보는 자세에 모로콘 백작이 당황했다.
  그런 백작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우리가 살던 곳의 인사입니다.”
  에이라나의 말에 모로콘 백작도 어색하게 웃으며 포권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포권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휘안이 눈을 흘겼다. 에이라나는 코웃음을 쳤다.
  “난 혈사 아저씨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예를 취하지 않아.”
  물론 일족의 어른들에게는 예를 취하겠지만 말이다.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해하십시오.”
  휘안의 말에 모로콘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소.”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한 학생이 말해왔다.
  “선생님! 두 분의 대결을 보고 싶습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습니다! 그랜드소드마스터끼리의 대결은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휘안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에이라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모로콘 백작이 말했다.
  “보고 싶다 해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끼리의 대결에서도 황제 폐하의 허락이 필요한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모로콘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로콘을 보며 휘안이 말했다.
  “어때? 한번 해볼까?”
  그 말에 에이라나도 피식 웃었다.
  “뭐, 예상은 했었다.”
  에이라나의 동의를 받은 휘안도 씨익 웃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겁니다.”
  고수들끼리 싸움을 피하는 것은 내공을 사용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휘안의 말에 모로콘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습니까?”
  “예.”
  그렇게 말한 휘안이 연무장으로 올라갔다. 에이라나는 이미 올라간 뒤였다.
  모로콘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생각했다.
  ‘그랜드소드마스터들끼리의 대결, 오러 블레이드는 사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대단한 대결이 될 것이 분명하다!’
  백작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연무장 위에서는 목검을 쥔 에이라나와 휘안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는 정확하게 휘안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학생들이 보기에는 단순한 찌르기였으나 학생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루이스는 어렴풋이 위험한 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모로콘 백작도 심상치 않은 찌르기라고 느꼈다. 자신이라면 막으며 피했을 것이다.
  휘안은 정확하게 검을 막았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이 변화를 일으키며 쾌검으로 바뀌어 정확하게 옆구리를 베어 들어갔다. 엄청난 변화에 모두가 감탄을 했다. 휘안은 그저 한 번 생긋 웃었다. 어느새 에이라나의 검을 박은 것이다. 에이라나와 휘안은 서로를 보며 히죽 웃었다.
  에이라나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그러고는 발뒤꿈치로 휘안의 관자놀이에 내질렀다. 엄청난 실전을 겪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휘안도 손으로 에이라나의 발을 막았다. 그리고 그대로 던져버렸다. 에이라나는 가볍게 착지했다.
  앞을 바라보니 휘안이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에이라나는 고개를 숙이며 휘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초식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단지 베기, 찌르기, 막기 이 세 동작뿐이었다. 하지만 현경의 경지의 두 사람이다. 그랜드소드마스터와 현경이 같은 경지라고 하지만 둘의 깨달음은 엄청났다.
  둘은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랜드소드마스터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엄청난 공방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그건 모로콘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하, 하나하나가 내가 막기조차 힘든 공격들이 아닌가?’
  역시 그랜드소드마스터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에이라나가 검을 내질렀다. 엄청난 속도로 내질러지는 검... 휘안이 그것을 막았다.
  빠각!
  그러자 동시에 두 사람의 검이 박살났다.
  “.....”
  모두가 침묵했다.
  학교에서 쓰는 검은 모두다 각목이었다. 보통 나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검을 맞댄 것은 겨우 10번 정도다. 겨우 그 정도로 검이 부러지지는 않는다.
  백작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은 서로 보며 피식 웃었다. 휘안이 모로콘 백작을 보며 물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모로콘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이 부러진 것은 뭔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 에이라나가 물었다.
  “너희는 뭘 봤냐?”
  학생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루이스가 머뭇거렸다. 에이라나가 루이스를 보며 물었다.
  “그래, 너 뭐 봤냐?”
  루이스가 말했다.
  “두, 둘 다 검이 부딪친 곳만 집중적으로 부딪쳤어요.”
  루이스의 말에 에이라나가 히죽 웃었다.
  “또?”
  “에... 힘이 한곳으로 집중되는 것만 같았어요.”
  휘안도 놀랐다.
  에이라나는 짐작했다는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발경의 수법이다.”
  “에?”
  에이라나가 루이스를 보며 말했다.
  “야, 너 오늘부터 키라이스트네 집에서 자!”
  “에?”
  갑작스러운 에이라나의 발언에 루이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부터 너에게 검을 가르쳐주마!”
  에이라나의 말에 수업을 듣던 모두가 경악했다. 루이스도 멍해졌다. 휘안이 물었다.
  “레니스가 택한 적임자를 저 아이로 할 거야?”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것도 있지만 왠지 불안해. 나는 상관없지만 이 제국에는 강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할 듯해.”
  레니스는 데프론 제국이 심상치 않을 거라 했다. 전쟁준비가 한창이다. 그건 아툰 제국도 안다. 하지만 이번에 데프론 제국이 모든 것을 걸 것이라 레니스가 말했다. 생각보다 심각했다.
  에이라나는 이제 데르나 공작가에 정이 많이 들었다. 그들이 속한 아툰이란 제국도 지켜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한계가 있다. 공식적으로 모든 힘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강자들이 필요했다. 그 구심점으로 루이스가 선택된 것이다.
  루이스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당황했다. 그리고 배우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루이스를 보며 빙긋 웃은 에이라나.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루이스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루이스는 오란 공작에게 허락을 받지도 않고 바로 키라이스트의 집으로 향했다. 루리아가 대신 말해주기로 한 것이었다.
  키라이스트의 마차에 키라이스트, 휘안, 에이라나 말고도 루이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집에 가는 동안 마차는 침묵의 시간뿐이었다.
  데르나 공작 저택에 도착한 에이라나가 루이스를 보며 말했다.
  “일단 대충 씻고 데르나 공작가의 제일 큰 연무장으로 나와.”
  에이라나의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루이스를 보며 키라이스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라나는 씻지도 않고 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휘안도 그를 따라갔다. 키라이스트와 루이스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키라이스트와 루이스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에이라나와 휘안은 연무장의 데르나 기사단의 기사단장에게 향했다. 기사단장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휘안과 에이라나의 기척을 느끼며 두 사람을 돌아보고 활짝 웃었다.
  “두 분, 평소에 연무장에 잘 오시지도 않으면서 어쩐 일이십니까?”
  기사단장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연무장을 빌렸으면 합니다.”
  그 말에 기사단장이 멈칫했다.
  “무슨...”
  “연무장을 무기한으로 빌려주세요.”
  에이라나의 말에 기사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물었다.
  “연무장을 통째로 무기한... 공작님의 허락을 받으셨습니까?”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나중에 받을 겁니다.”
  에이라나가 기사단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기사단장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뭐, 에이라나님이 빌린다면 이유가 있겠죠.”
  기사단장의 말에 에이라나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일단 비켜 주시겠어요?”
  그 말에 기사단장이 의아해했지만 순순히 비켜주었다.
  연무장 중앙으로 간 에이라나가 말했다.
  “실프.”
  에이라나의 부름에 응답하는 듯 에이라나 앞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그 바람이 뭉쳐 한 소녀를 뱉어냈다. 그것을 보고 휘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이라나가 실프를 보며 말했다.
  “실프, 근처의 돌멩이들은 다 이 연무장으로 모아줘.”
  그 말에 실프가 빙글빙글 돌면서 알겠다는 듯 생긋 웃으며 날아갔다. 에이라나는 실프를 몇이나 더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휘안이 당황하며 물었다.
  “뭐, 뭐냐? 저것들은? 바람의 기운이 아주 강력하게 모여 있는데?”
  아직 정령을 모르는 휘안이었다.
  그런 휘안을 보며 에이라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넌 책이나 읽어서 지식을 쌓아라.”
  설명하기 귀찮은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 앞에 돌멩이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녀는 실프들에게 말했다.
  “고마워.”
  그 말에 실프들이 생긋하며 사라졌다.
  에이라나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자, 그러면 귀차니즘을 감수하고 진을 만들어 볼까?”
  에이라나는 진을 만들 생각이었다. 아무리 무인이지만 기본적으로 진에 대한 책도 읽었던 에이라나다. 그리고 드래곤이 되면서 그 진에 대한 지식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뭐, 전문적으로 진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휘안도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팔괘환상진을 만든다고 했지?”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멩이들을 쌓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행동에 근처에 수련하던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경공을 이용하며 빠른 속도로 침착하게 돌을 쌓기 시작했다. 연무장에 팔각형으로 돌탑을 쌓고 그 안쪽에 몇 개의 돌탑을 더 쌓았다.
  그리고 에이라나가 가운데 돌탑을 남겨두며 말했다.
  “완성이네.”
  “그러게.”
  팔괘환상진.
  아주 기본적인 진이었다. 진에 대해서 한 번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진이랄까? 이건 보통 수련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진이었다. 하지만 에이라나와 휘안이 그냥 팔괘환상진을 만들었을 리 없었다.
  “마법진까지 사용했으니 수련하기에 딱이지.”
  마법진까지 몇 개 그려놓았다. 그리고 마법석 몇 개를 심어둔 상태였다. 이거 꽤 심각했다.
  그렇게 진이 끝나갈 때쯤 키라이스트와 루이스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연무장 위에 이상한 돌탑이 쌓아져 있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라나와 휘안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했다. 에이라나가 마지막 돌을 돌탑 위에 쌓았다.
  우웅!
  진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탑들 위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면서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그러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키라이스트와 루이스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이었다.
  휘안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루이스, 저 안으로 들어가라.”
  휘안이 루이스에게 롱소드를 건네며 말했다.
  “네 힘을 시험해 보겠다. 저기에는 환상으로 만들어진 검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환상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진짜로 베이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들의 검에 맞기라도 한다면 고통은 그대로 느껴지니까. 저 안에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과 소드마스터 상급급의 검사들이 즐비해 있다. 물론 그들의 수준은 대륙의 검사들의 검술 실력을 초월한다.”
  그 말에 루이스가 입을 쩍 벌렸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말인가?
  “위험에 빠지면 진 가운데에 있는 에이라나가 구해주겠지. 아무튼, 에이라나를 찾아라. 그것이 이 훈련의 목적이다. 그리고 오늘은 네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그냥 들어가지만 내일부터는 내가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마.”
  에이라나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말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저 진은 휘안이 컨트롤하기에는 곤란한 진이었다. 저 진은 마진의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진이 있기 때문에 컨트롤 하는 건 에이라나가 편했다. 뭐, 휘안에게 초식을 가르쳐주면서 에이라나도 이것저것 조정을 해주겠지만.
  루이스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라나 님을 찾으면 되는 거죠?”
  루이스의 물음에 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이스는 간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위화감을 느끼며 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루이스를 보며 휘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처음부터 너무 강수를 쓰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휘안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루이스는 진으로 발을 딛자마자 놀랐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연무장은 온데간데없었다. 울창한 숲뿐이었다.
  “환상 마법진이라고 했는데, 이런 건 처음 봐.”
  루이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파밧!
  숲 속에서 한 무리가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은 루이스를 보자마자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조금 당황한 루이스였지만 ‘시작인가?’라고 생각하며 롱소드를 뽑았다. 그들이 루이스에게 달려들자, 루이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의 검을 막았다.
  챙! 챙!
  루이스는 조금 당황했다. 자랑은 아니었지만 소드 익스퍼트 상급인 루이스였다. 검술을 시전하는 루이스.
  하지만 무리들 한 명 한 명이 기사급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루이스였다. 그들은 중원 무림에서 삼류급 검사들이었다. 그렇다 해도 기본적인 무공은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루이스를 습격한 무리는 모두 다섯! 루이스는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할 수 없이 오러를 일으켰다.
  그러자 당황하는 상대들. 그런 그들을 향해 루이스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아직 오러를 사용할 수는 없는지 결국 루이스의 검에 하나둘씩 쓰러졌다. 아직 실전경험이 없는 루이스는 사람을 베는 느낌이 그대로 느껴지며 피가 튀자 당황했다.
  그렇게 루이스가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끌끌끌, 색목인이 아닌가?”
  흠칫!
  루이스가 당황하며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역시 이상한 복장에, 백발에 흰 수염을 가진 한 노인이 자신을 보고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루이스가 물었다.
  “누구신가요? 그리고 여기는 위험합니다. 아주 강한 사람들이 많아요.”
  루이스의 말에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위험하다? 강한 사람? 너는 혹시 거기 쓰러져 있는 삼류 잡배들을 보며 말하는 것이냐?”
  그 말에 루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사, 삼류요?”
  그 말에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것들이 삼류지, 이류라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아까 검기를 사용하던데, 왜 검기는 사용하면서 검술 실력은 그 모양 그 꼴이냐?”
  그 말에 루이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이 심하세요.”
  그 말에 노인이 껄껄 웃었다.
  “서역은 중원과 다른가 보이...”
  그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노인이 말했다.
  “너는 어떻게 여기 왔느냐?”
  그 말에 루이스가 말했다.
  “휘안 형이 보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곳까지 왔는지 궁금해요. 혹시 할아버지도 환상인가요?”
  노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분노하기 시작했다.
  “감히! 날 환상 취급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노인의 목소리에 휘안이 순간 휘청거렸다.
  “허, 허억!”
  루이스가 비틀거렸다.
  “감히 마교의 교주! 나 사혈사를 그따위 취급하다니!”
  그는 바로 사혈사였다. 우연치 않게 사혈사도 이 진의 환상으로 나온 것이다. 물론 보통 중원 무인들이라면 그가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기의 흐름이 이상했기에, 하지만 여긴 리샨 대륙이다.
  사혈사가 소리쳤다.
  “헛소리를 한 죄... 죽음으로 갚아라!”
  쾅! 콰가가가가강!
  “헉!”
  루이스가 경악했다. 엄청난 위력으로 뻗어오는 칠흑 같은 검강! 바로 그랜드소드마스터만이 쓸 수 있는 공격이었다.
  루이스가 오러를 일으켰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쾅! 콰가가가강!
  “끄악!”
  루이스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루이스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피가 여기저기 튀었다. 팔은 물론 다리도 날아갔다. 허리 역시 양분된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보고 루이스는 쇼크를 받았다.
  멍하니 루이스가 날아갈 때, 갑자기 고운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차렷!”
  에이라나는 루이스를 받았다.
  원래 팔괘환상진은 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순전히 마나석의 위력과 마법진의 위력이 어우러져 이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진의 위력을 턱 없이 늘리는 돌탑도 몇 개나 쌓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허접한 진은 중원 무림 고수들이라면 무시할 정도지만 리샨은 그렇지 못했다.
  루이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자신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드니 그것은 바로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가 한숨을 쉬며 루이스를 안은 상태에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느새 그의 손에는 돌멩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진이 사라졌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에이라나가 한숨을 쉬었다.
  “에고, 처음부터 혈사 아저씨를 만나다니. 그것도 혈사 아저씨의 성격을 건드려? 너 쇼크사 하고 싶냐?”
  혈사를 돌아다니게 만든 것은 에이라나의 잘못이었다. 도대체 누구를 탓하는 것인가?
  루이스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에이라나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에이라나도 그런 루이스를 보더니 그대로 놔버렸다.
  쿵!
  “끄악!”
  루이스가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자애 같은 외모의 루이스다. 그것도 엄청 예쁘게 생긴. 식은땀을 흘려서 그런지 달빛에 비친 루이스는 더 아름다워 보였다.
  뭐 에이라나가 더 아름다웠지만 말이다.
  루이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엉덩이를 문질렀다.
  휘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꽤 빨리 나왔군, 한 시간 정도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에이라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초반부터 혈사 아저씨랑 맞부딪혔는데, 아저씨 성격 건드려서 탄검강 다발에 몸이 더 아작 나기 전에 구해줬지.”
  그 말에 휘안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이 미친놈아! 애 쇼크사 시킬 일 있어? 미쳤다고 마교의 교주를 풀어놔? 소드마스터 상급급의 무인을 풀어놓는다고 했잖아! 현경, 그랜드소드마스터급의 마교 교주를 풀어놔?”
  그 말에 에이라나는 코웃음만 쳤다.
  “이 녀석이 재수 없는 거지.”
  휘안과 에이라나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방금 전 일어난 일이 꿈이 아닌가 생각하며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 * *
  데르나 공작가에서 출입금지 구역이 생겼다. 바로 데르나 공작가에서 가장 큰 연무장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갑작스레 엄청나게 강한 검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나온 그들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앞으로 여기 들어오면 다 내 손안에 죽는다. 귀찮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 말에 아무도 그곳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루이스는 에이라나의 진에서 실전경험을 쌓고, 휘안에게는 남궁세가의 상승무공 중 하나를 배우고 있었다.
  무공의 이름은 쾌환검. 빠른 속도와 현란한 환검으로 이루어진 초식이었다. 처음부터 루이스의 가문 검술이 쾌검이라 그것을 전해준 것이지만 말이다. 쾌환검을 익히며 루이스의 검술실력은 나날이 상승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에이라나와 휘안은 루이스를 앞에 앉혀두고 고민했다.
  “뭘 가르쳐 주지?”
  “그러게, 슬슬 심법을 가르쳐 줘야 하는데.”
  에이라나와 휘안의 고민은 ‘어느 심법을 가르쳐 주느냐’하는 것이었다. 너무 상승의 심법을 가르쳐 주기에는 아까웠다. 그렇다 해도 너무 싸구려를 가르쳐 주는 것도 문제였다.
  “삼재심법을 가르쳐 줄까?”
  에이라나의 말에 휘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평범하잖아.”
  “흐응... 그래도 이곳은 대기에 기가 풍부하다면서? 충분히 상승심법의 효과를 낼 수 있어. 심법을 무시하냐? 삼재심법을 익힌 사람에게 중원 무림을 내줬던 주제에.”
  그 말에 휘안이 흠칫했다.
  삼재검법을 만든 이는 천하의 최고수였다. 그 다음에 삼재검법의 진정한 묘리를 익힌 이는 정파에서 이유 없이 악적으로 몰렸다가 마교에 의탁해 신화경에 올라 중원 무림에 복수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휘안에게 혀를 찬 에이라나가 루이스를 보며 말했다.
  “루이스, 이제 우린 너에게 심법이란 걸 가르쳐줄 거야.”
  “심법?”
  에이라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루이스.
  그런 루이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마법을 어떻게 익힐 수 있는지 궁금하지?”
  그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소드마스터나 되는 인물이 마법을 익혔다.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런 루이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건 나나 휘안이 마법사처럼 마나를 모으고 저장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나를 모으다니? 어떻게?
  그런 루이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이제껏 네가 저 진 안에서 상대했던 모든 이가 마나를 모아 저장한 상대들이다. 그들은 대륙의 검사들보다 더 오랫동안 검기와 검강을 사용할 수 있지.”
  진 안에서 한 달 동안 뒹군 루이스는 ‘검기와 검강’이 뭘 가리키는지 잘 알았다.
  루이스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모을 수 있어요?”
  그 말에 에이라나가 히죽 웃었다.
  “잘.”
  순간 루이스가 휘청했다.
  그런 루이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 가르쳐 준다는 게 아니냐?”
  “에?”
  “심법을.”
  루이스는 바보가 아니다. 심법이 뭘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르쳐 줘도 되요?”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가 익히는 걸 가르쳐 준다는 건 아니야. 알고 있는 걸 가르쳐 줄게.”
  그 말에 루이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루이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단!”
  에이라나의 말에 루이스가 긴장했다.
  “만약에 후대에 이것을 전해줄때는 꼭 네 후계자에게만 전해줘라.”
  그런 에이라나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루이스.
  “단 한 명에게만 전해주란 이야기다. 쾌환검도 마찬가지고.”
  쾌환검은 상승무공이긴 하지만 비급급 무공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륙에서는 엄청난 검술이지만 말이다.
  그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루이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심법이 대륙에 퍼지면 오란 공작가는 그날로 대륙에서 지워질 줄 알아라.”
  루이스는 그 말에 움찔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이 보기에는 에이라나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에이라나가 휘안에게 가부좌를 가르쳐 주었다. 루이스가 가부좌를 틀자 에이라나가 삼재심법의 묘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외우는 루이스.
  에이라나가 말했다.
  “눈을 감고 마나를 느껴봐. 그리고 마나를 들이마신 다음 배 아래쪽에 집중시켜.”
  오러를 사용하는 루이스였기에 마나를 느끼고 배 아래쪽에 집중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배 아래, 즉 단전에 마나를 모으고 삼재심법의 묘리를 이용해 마나를 운용하자 조금씩 마나가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신기함을 느낀 루이스였다. 루이스는 마나를 모으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렇게 루이스가 계속 마나를 모으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어느 덧 저녁 먹을 때가 되었다.
  에이라나가 운기 중인 루이스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강제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끊었다. 원래 아주 위험한 행동이지만 드래곤이자 경지에 든 에이라나에게 쉬운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마나의 흐름이 끊어지자 루이스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까지 모을 거냐? 그만해라.”
  에이라나의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식당으로 향했다.
  에이라나가 중얼거렸다.
  “영약 같은 걸 구해서 루이스에게 퍼 먹일까?”
  그 말에 휘안이 말했다.
  “어이구야, 그런 게 널려있을 리 없잖아?”
  루이스가 물었다.
  “영약이 뭐에요?”
  그러자 에이라나가 품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약초 하나를 꺼냈다.
  “이런 거.”
  그 약초를 보며 루이스가 말했다.
  “어? 에루로니안이잖아요? 꽤 귀한 약초인데... 차로도 끓여먹지 않아요.”
  루이스가 태평하게 말했다. 하지만 휘안은 달랐다.
  휙!
  휘안이 에루로니안이라는 약초를 잡아채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거 뭐야? 그렇게 내공을 확 끌어올리는 건 아니지만, 이거 영약 맞잖아?”
  영약이라 불릴 정도의 기를 품고 있는 에루로니안.
  루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휘안 형, 뭐라는 거에요?”
  한 달 동안 꽤 친해진 세 사람이었다.
  에이라나가 간단하게 말했다.
  “뭐, 쉽게 말해 저 녀석은 저런 거 퍼 먹고 마나를 모았다 이거지. 저거 잘 운용하기만 하면 마나가 내 아랫배, 즉 단전에 쌓이거든?”
  그 말에 루이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이죠?”
  “사실이야.”
  루이스가 멍해졌다.
  꽤 귀한 약초다. 그런데 저런 걸 먹고 아까처럼 단전이란 곳에 마나를 모은다고?
  그런 루이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뭣하면 내일 저거 엄청 퍼 먹어봐.”
  그 말에 흠칫하는 루이스였다.
  진짜 퍼 먹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키라이스트는 요즘 심심했다. 에이라나가 루이스에게 검술을 가르친답시고 이상한 마법진 안에 들어가 안 나왔기 때문이었다.
  키라이스트는 조금 뚱한 표정을 지으며 스테이크를 썰어먹었다.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아르카아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루이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에이라나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에이라나는 그것에 친절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물론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에이라나가 키라이스트를 불렀다.
  “키라이스트.”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너도 내일부터 루이스 훈련에 동참해. 너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지?”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눈을 크게 떴다.
  아르카아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키라이스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런 키라이스트를 보며 에이라나가 휘안에게 말했다.
  “키라이스트는 검에 변화를 주어 적의 급소를 노리는 검술을 익히고 있어. 참월검을 가르쳐 주면 될 거야. 삼재심법도 같이 가르치자.”
  그 말에 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아레인이라는 애는 안 가르치냐?”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가르칠 거야. 녀석은 중검, 무거운 검술을 구사하니깐 파천검을 가르쳐 줘.”
  휘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째... 그런 걸 다 날 가르치냐?”
  그런 휘안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럼 마교의 무공을 가르치랴?”
  그러자 휘안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라나도 정파의 무공을 가르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익숙지 않았기에 휘안에게 가르치는 것을 떠넘겼다.
  그리고 에이라나는 진 안에 들어가 진의 밸런스를 조정하는 듯 섬세한 부분을 조정하곤 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일일이 무공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귀찮았다.
  어쨌든 휘안도 불만은 없었다. 반면에 아르카아 공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나? 겨우 연무장 안에서 환상과 싸우는 것이고, 안 그래도 좁은데 셋이 들어가면...”
  그런 아르카아 공작을 보며 루이스가 정색하며 말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일단 들어가면 숲길이 나와요. 안에 들어가 보면 실제 연무장의 몇 십 배의 넓이에요.”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과 키라이스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라나가 말했다.
  “실전은 중요한 법.”
  에이라나가 묘한 말을 남겼다.
  오늘은 주말.
  루이스의 옆에는 에이라나가 앉아 있었다.
  아레인과 키라이스트는 휘안에게 검술 이론을 배우고 있었다.
  루이스가 물었다.
  “에이라나 누나, 저 진법이라는 곳 안에 있는 환상들 중 가장 강한 환상은 누구에요6?”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네가 들어가자마자 부딪혔던 혈사 아저씨.
  그 말에 루이스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아직도 한 달 전의 끔찍한 일을 잊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누구죠?”
  루이스의 물음에 에이라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 스승님.”
  에이라나의 말에 루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키라이스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에이라나의 스승님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긴 하지. 중원과 리샨 대륙은 전혀 다른 세상이니깐...
  루이스가 입을 열었다.
  “에... 그 혈사라는 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대륙에는 그런 이름이 없는 걸로 아는데.”
  루이스의 물음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성격이 지랄 같은 사람이었어.”
  에이라나의 물에 루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에이라나의 간단명료한 말. 하긴, 성격 지랄 같다는 말이 정답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에이라나의 말에 루이스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에이라나가 일어났다.
  루이스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일루와, 나랑 대결하자.”
  그 말에 루이스가 굳었다. 휘안에게 강의를 듣고 있던 아레인과 키라이스트 역시 굳었다.
  휘안이 말했다.
  “애 잡으려고?”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공격은 안 할거야.”
  그 말에 세 사람은 안도했지만 연무장에는 올라갈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터덕터덕 걸어가는 에이라나와 그 뒤를 따르는 루이스...
  연무장 옆에 커다란 공터에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르릉.
  루이스가 롱소드를 뽑아 쥐고 자세를 잡으며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에이라나도 하품을 하며 검을 뽑았다.
  늘 에이라나의 품에 있던, 검집이 가죽으로 된 검이었다. 하지만 그 검이 뽑혀져 나오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루이스는 그대로 굳었다. 루이스뿐만 아니라 검을 처음 보는 아레인, 휘안도 굳었다.
  흑빛으로 빛나는 검신을 가진 검이었다. 흑빛이라고 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검...
  검이 뽑혀져 나오자 ‘우우웅’하는 소리를 내며 살짝 검명을 토해냈다.
  휘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야, 저 검... 고작 검이 저런 기운을 품고 있다고?”
  흑빛 검신을 가진 흑아.
  다시 말하지만 흑아가 품은 기운은 인간이 쥘 수 있을 만한 검이 아니다. 쥐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만약 쥐고 휘두르려 한다면 흑아는 자신을 휘두르는 존재가 자신보다 약하다면 바로 그 영혼을 소멸시켜버릴 것이다.
  그것이 드워프들이 흑아를 신검이라 부르는 이유였다. 흑아보다 강하지 않는 이상 흑아를 휘두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에이라나와 흑아의 힘은 거의 성룡과 대등하다. 에이라나가 내공과 마나를 모두 총동원해서 굴복시킨 검이니까 말이다.
  물론 당시 에이라나가 어리기는 했지만, 그때 그녀는 이미 성룡도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뭐, 에이라나가 말한다면 흑아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쥐고 휘둘러도 가만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흑아는 그저 단단하고 예기가 강한 검일 뿐 그 기운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어마어마한 예기에 모두가 살짝 몸을 떨었다.
  “저, 정말로 공격 안 할 거죠?”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안 한다니깐? 남자가 왜 그렇게 소심해?”
  에이라나의 말에 루이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루이스는 양손으로 검의 그립을 꼭 쥐더니 에이라나에게 달려들었다.
  깡!
  흑아와 루이스의 롱소드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서로 힘겨루기를 하던 루이스와 에이라나.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루이스가 밀리기 시작했다. 에이라나는 한손으로도 여유롭게 루이스를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루이스는 에이라나의 검을 떨쳐내더니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현란한 검의 움직임. 이전과는 분명 다른 공격이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공격을 막았다. 그렇게 모든 검을 막은 에이라나가 루이스를 보며 말했다.
  “뭐야? 이게 끝이야?”
  그 말에 루이스가 더욱 강하게 롱소드를 쥐더니 드디어 쾌환검을 사용했다. 쾌환검의 초식 중 하나인 환운검. 환검이 시전되며 에이라나를 압박해갔다.
  하지만...
  까가가가가강!
  모두 막혔다.
  그것을 보면서도 루이스는 예상했다는 듯 뒤로 빠졌다. 그리고 검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우웅!
  그리고 솟아오르는 오러! 그것을 보고 루이스가 쾌환검의 쾌광검을 사용하며 검을 휘둘렀다.
  에이라나는 그것을 보더니 히죽 웃으며 검을 내리쳤다.
  쾅!
  검과 검기인 오러가 부딪쳤다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소리에 루이스가 경악했다.
  “미, 미스릴? 아냐, 오리하르콘!”
  미스릴이라도 이렇게 오러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100%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이라도 오러와 격돌한다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기 때문이었다. 오러와 오러 블레이드를 막을 수 있는 금속은 오리하르콘밖에 없었다.
  루이스가 경악하든 말든 에이라나가 입을 열었다.
  “계속 그렇게 멍하니 있을 거냐?”
  그 말에 루이스가 침착함을 되찾으며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한 이십 분 정도 지났을까?
  루이스의 오러가 간당간당하다가 거의 사라져갔다.
  “생각보다 오래 버텼군.”
  휘안이 중얼거렸다.
  에이라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겠네?”
  그 말에 루이스가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오러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쾌환검의 마지막 초식을 사용했다.
  쾌환운광창검!
  엄청난 속도와 현란하게 움직이는 환검을 보며 에이라나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제법이야.”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그에 대응할 초식을 사용했다.
  “천마십환검.”
  열 개의 환검이 루이스의 모든 검을 쳐냈으며 마지막으로 루이스의 롱소드의 검신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그러자 검이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갔다. 루이스는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날아가던 검은 휘안의 손에 들어갔다.
  에이라나가 손목을 움켜쥐는 루이스의 손목을 보더니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는 루이스의 손목을 감싸 안았다.
  에이라나가 루이스를 일으켜 세우더니 말했다.
  “난 치료사에게 루이스의 손목을 보이고 오지. 너희 둘은 휘안과 한 판씩 붙어.”
  그 말을 하고 에이라나가 루이스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휘안이 설명하는 것을 멈추며 말했다.
  “자, 누구부터 할래?”
  키라이스트와 아레인도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에이라나는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레니스가 보내온 전서구를 보며 에이라나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르카아 공작에게 물어봐야겠네.”
  레니스가 보내온 전서구는 간단했다.
  <데르나 제국, 그 싸가지들이 전쟁 준비를 거의 끝마쳐 간다. 드래곤들도 그 나라에 악감정 많으니깐 그냥 무너뜨리자.>
  이것이 다였다.
  데르나 제국은 드래곤들에 밉보인 상태였다. 워낙 싸가지 없는 정책을 펼치다 보니 드래곤들은 그들에게 악감정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여러 나라 드래곤들이 유희한답시고 그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 아툰 제국도 어딘가에 그런 드래곤들이 있을 것이다.
  에이라나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리샨 대륙은 세 개의 제국과 열 개의 왕국, 그리고 스무 개 정도의 소왕국으로 되어 있었다. 그중 데르나 제국은 군사 강국이었다. 아마 그 데르나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제국은 반으로 쪼개져 싸울 것이다.
  데르나 제국의 영향력은 그만큼 컸다. 최고의 전성기인 것이다. 그렇게 되니깐 간덩이가 부었다고 할까? 에이라나는 데르나 제국에 악감정은 없지만 그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킬 생각이었다. 이번 유희의 목적은 전쟁에서 신나게 싸우는 것이다. 물론 키라이스트의 누나 역도 할 생각이지만.
  키라이스트에게 정이 상당히 든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가 그렇게 뭔가를 생각하며 편지를 태워버린 후, 얼굴을 찌푸리더니 생각을 끝마쳤다.
  “좋아, 내년 봄까지 셋 다 소드마스터로 만들어주지!”
  남들이 들었다면 기겁할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하는 에이라나였다.
  다음날, 에이라나는 어디 외출할 것이라고 말한 다음 수도에서 벗어난 다음 워프를 사용했다. 물론 휘안은 없었다.
  에이라나가 워프를 해서 떨어진 것은 어느 울창한 숲이었다. 하지만 숲이 보통 숲은 아니었다. 숲에는 마을이 있었다. 바로 레랴니스의 영역에 있는 엘프 마을이었다. 에이라나의 신형이 엘프 마을로 떨어졌다.
  사뿐.
  에이라나가 사뿐하게 엘프 마을에 착지했다.
  “헛! 뭐야?”
  “이, 인간이다!”
  “인간이 나타났다!”
  엘프 마을은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그런 엘프 마을을 보며 에이라나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씨발, 인간 처음 봐?”
  에이라나가 소리치자 모두가 멈칫했다. 에이라나의 스산한 살기 때문이었다. 에이라나가 슬쩍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에이라나의 뒤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뭐야? 에이라나잖아?”
  에이라나가 뒤돌아서려 할 때, 그녀는 이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씨발, 역소환시키기 전에 입 닥치시지?”
  “큭큭큭, 그 말투 여전하시군.”
  에이라나를 안은 남자는 바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였다.
  * * *
  에이라나가 엘프 마을에 찾아왔다는 말에 엘로카, 로카나, 레리아가 찾아왔다. 이 마을에서 에이라나와 가장 친분이 있는 세 엘프였다.
  엘로카가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그런 엘로카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런가? 한 오십 년 만이네.”
  에이라나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레리아가 물었다.
  “어쩐 일이야?”
  레리아, 350년 전 에이라나의 살기를 느끼고 너무 놀란 나머지 도망갔던 엘프 소녀로 에이라나와는 동갑이었다. 그렇기에 둘 다 말을 놓기로 했다. 레리아의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부탁이 있어서.”
  에이라나의 말에 엘로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이라뇨?”
  그런 엘로카를 주시하며 에이라나가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지? 요즘 인간 세상이 어지럽다는 거?”
  그 말에 엘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엘로카를 보며 에이라나가 입을 열었다.
  “난 내가 있는 나라만은 꼭 살리고 싶어. 그래서 소드마스터들을 만들 생각이야.”
  그 말에 엘로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요?”
  “딱 세 명만 만들 생각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수련할 장소로 여기를 쓰면 안 될까?”
  그 말에 엘로카가 멈칫하더니 멀뚱멀뚱 에이라나에게 딱 잘라 말했다.
  “안됩니다.”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좀 봐주라.”
  그 말에 엘로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엘로카를 빤히 바라보는 에이라나.
  “로카나, 나 말고 다른 강자와 붙어보고 싶지 않아?”
  그 말에 로카나가 말했다.
  “강자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 말에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검으로... 윔급 드래곤 이하의 성룡들이라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검사라면?”
  그 말에 로카나가 멈칫했다. 그런 검사가 있을까? 보통 그랜드소드마스터들도 500살 만 해도 드래곤과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런 로카나를 보며 히죽 웃은 에이라나. 이미 로카나는 넘어온 상태였다. 로카나도 마을에서는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엘프였다. 그녀도 하이엘프였던 것이다.
  로카나가 질문했다.
  “정말... 그런 검사가 있습니까?”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고 에이라나가 엘로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엘로카, 내 부탁을 들어주면... 좋은 걸 가르쳐 줄게.”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엘로카.
  “좋은 것 말입니까?”
  그 말에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연의 기운을 이용해 결계를 치는 방법.”
  그 말에 엘로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흔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마법이잖아? 그건 조금 불안한 면이 있다구.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결계는 단순하게 침입을 튕겨내는 것이 아니야.”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엘로카였다.
  “그럼 뭐죠?”
  그 말에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진 안으로 들어온다면 환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좀 더 고난이도의 진은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면 진짜처럼 상황이 벌어져 상대를 죽이는 살진.”
  그밖에 진에 대한 설명을 더 해주었다. 그 말에 엘로카가 눈을 크게 떴다. 환상을 보여주는 마법진은 이미 있었다. 하지만 에이라나가 말한 것처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정말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엘로카가 물어왔다.
  그러자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탁월한 선택이야.”
  그렇게 엘프 마을과 에이라나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에이라나는 데르나 공작가로 돌아오자마자 아르카아 공작에게 말했다.
  “루이스, 키라이스트, 아레인! 이 세 명을 데리고 몇 달 동안 어디 좀 갔다 올 예정입니다.”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에이라나를 보며 물었다.
  “몇 달 동안 어디를 간단 말인가?”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산에서 검술 수련을 시킬 생각입니다. 이런 곳보다는 산이 수련시키기 더욱 좋을 테니까요.”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중얼거렸다.
  “흐음... 산이라...”
  자신이 생각해도 에이라나의 말은 타당했다. 이런 곳보다는 산이 훨씬 수련하기 좋은 장소였다. 자연을 느끼며 검술을 수련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곧 데프론 제국에서 도발해올 것이네. 아이들이 수련을 해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얼마 있으면 데프론 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그동안 아이들이 수련해봤자 얼마나 강해지겠는가?
  그런 아르카아 공작을 보며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돌아오는 시간은 내년 봄 쯤, 그때까지 셋 다 소드마스터로 만들어 오지요.”
  “아... 겨우 몇 달 만에 소드마스터를 만들어 봤.....”
  에이라나의 말에 대답하려던 아르카아 공작이 멈칫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에이라나를 보며 물었다.
  “자네, 방금 뭐라 그랬나?”
  아르카아 공작의 말에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돌아올 때쯤, 셋 다 소드마스터로 만들어 놓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아르카아 공작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 지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그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가능한가?”
  “못할 것 없지요.”
  아르카아 공작이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키라이스트는 허락하겠는데 다른 애들은 장담 못하네.”
  “안 된다면 말죠.”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아르카아 공작의 집무실을 나갔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아르카아 공작이 중얼거렸다.
  “소드... 마스터라.....”
  에이라나는 키라이스트를 비롯한 세 사람이 훈련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세 사람을 보며 소리쳤다.
  “짐 싸라.”
  에이라나의 갑작스러운 말에 모두가 멈칫했다. 휘안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그 말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넌 입 닥치고 너희들 다 짐 싸! 산으로 수련 간다!”
  그 말에 키라이스트가 물었다.
  “갑자기 뭔 수련?”
  그 말에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년 봄까지 너희들 전부 소드마스터로 만들어주마.”
  그 말에 루이스와 키라이스트, 아레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모두가 공통된 생각을 했다.
  ‘여기서 안 튀면... 우린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셋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튀어!”
  키라이스트가 외쳤다.
  퍽!퍽!퍽!
  바로 키라이스트, 루이스, 아레인 뒤에 나타난 에이라나가 세 사람의 머리를 한 번씩 가격했다. 휘청거리는 세 사람.
  그런 그들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내가 너희를 죽이냐, 죽여?”
  “크윽... 그, 그게 아니라.....”
  퍽!
  “끄악!”
  변명하는 아레인의 뒤통수를 한 번 더 가격하는 에이라나의 손바닥.
  “이것들이 소드마스터 만들어준다니까. 정신 상태부터 글러먹었구만? 세 명 다 덤벼! 수련가기 전에 그 정신 상태를 제대로 고쳐주지!”
  “커억! 누나, 진정을!”
  “지, 진정해요! 누나!”
  “우리는 살고 싶어!”
  키라이스트, 루이스, 아레인 순으로 절규하며 말했다.
  “닥치고 덤빌 생각 없으면 맞아라.”
  후웅!
  검집 채로 휘둘러지는 에이라나의 은아.
  쿵!
  그리고 은아의 검집을 막는 루이스의 검집.
  후웅!
  퍽!
  바로 루이스의 옆구리를 가격하는 흑아의 검집이었다.
  “악!”
  휘청거리는 루이스를 밀어붙인 에이라나가 다음으로는 양손에 흑아와 은아를 쥐고 아레인과 키라이스트에게 휘둘렀다. 겨우겨우 흑아와 은아를 막은 두 사람.
  “끄악! 누나 진정을 해요!”
  어렵게 일어선 루이스가 소리쳤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묵묵히 검집에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실력이 조금 늘었네?’
  하지만 에이라나는 속으로 세 사람의 향상된 실력을 느끼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세 사람에게는 그것이 사신의 미소처럼 보였다. 그날 결국 보다 못한 휘안의 도움에 의해 세 사람은 겨우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에이라나가 그런 세 사람을 보며 중얼거렸다.
  “꽤 오래 버텼네? 아무튼 아르카아 공작님께는 허락받았고 루이스, 아레인, 집에 가서 부모님께 수련하러 몇 달 동안 산에 간다고 허락받고 와. 안 해주면 말고.”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가 다시 돌아서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휘안이 말했다.
  “쯧... 너희들 괜한 말 꺼내가지고... 아무튼 준비해. 에이라나가 소드마스터 만들어 준다고 하면 만들어주는 거니까 조금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마지막 말에 세 사람은 몸을 떨었다.
  ‘크흑... 우린 죽을 거야.’
  ‘살고 싶어!’
  하지만 그 생각과는 다르게 세 사람의 눈은 굳은 각오로 빛나고 있었다. 에이라나는 빠른 성장을 하는 자신들을 보고도 칭찬 한 번 해준 적이 없었다. 그저 그렇다는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더욱 섭섭한 세 사람이었다.
  ‘꼭! 꼭 인정받고 말겠어!’
  세 사람은 똑같이 에이라나에게 인정받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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